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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9] 파업의 불씨는 외국 업체와 임금 차이

사실 1966년 중반기부터 파업의 징후는 포착됐고 7월 13일 건설업체들이 진출했던 캄란기지 공사장에서 한국인 노무자와 필리핀 노무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한 것이 심상치 않은 파업의 서곡이었다. 이미 공개된 내용이지만 현대건설이 미 해군 기지인 캄란만 준설공사를 수주한 것이 66년 1월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불과 6개월 만에 발생한 스트라이크였다. 그러면서 7월 30일에는 한진에서도 불상사가 발생해 파업 주동자 14명을 해고와 동시에 강제송환까지 했지만 10월이 되자 미국 비넬사 소속으로 파월했던 한국 기술자 45명이 24시간 노동 강요에 반발해 귀국하는 사태가 또 발생했다. 정부는 인력수출이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데 심각성을 느끼고 곧바로 관계관들을 급파해 실태파악과 파업 주동자들을 해고시키는 강경책을 썼지만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부총리를 중심으로 임금이 낮은 한국 기업들에는 각별히 신경 써서 지도감독을 철저히 하라고 훈령을 내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66년 연말 재외공관장 회의를 통해 '우리 근로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국가 체면에 먹칠을 하고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다소 다듬지 않은 언어를 써가며 단호하게 못을 박기도 했지만 몇몇 기업체 현장에서는 마찰이 계속됐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진상사의 조중건 상무는 군 부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노무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그땐 한국군도 전부 미군에게 빌려 쓰는 셈 아닙니까. 침대도 자동차도 총까지도 말이지. 그렇다고 당신들도 빌려 쓰는데 빌린 거 우리도 좀 빌리자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린 민간인인데. 솔직히 우리 회장이나 나나 진심으로 노무자들 처지를 걱정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군부대로 뛰어다니면서 부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일하려고 온 사람들 아니오?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필요한 건 준비해가지고 와야 하는 게 원칙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정말 회장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 뛰어다녔어요. 그래가지고 이범준 사령관에게 40명씩 들어가는 천막도 50여 개 빌리고 야전용 침대까지 빌렸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침대생활 할 때가 아니잖아요. 허리 아플까 봐 등받이까지 다 빌렸다구요. 그러니까 노무자들이 필요한 건 거의 준비를 해준 셈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상철 대사도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한진상사 노무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것도 가만 생각해 보면 물론 해외진출 경험이 없다 보니까 그랬겠지만 그때 한진이 처음 자리를 잡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날아왔는데 비가 쏟아져도 천막이 있어요? 제대로 된 노무자들 숙소나 막사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가지고 조중훈 사장이 특별히 부탁도 해오고 조중건씨는 현지에서 쫓아다니고 그랬는데 우리 군에서 쌀도 주고 외곽지대 경비도 서 주고 물까지 주고. 군대에서 그렇게 지원을 많이 해 준 겁니다." -민간업자인데도 군에서는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한 셈이군요. "그때는 군관민이 따로 없어요. 다 애국자지. 민간인도 애국자 군인도 애국자. 조국 근대화를 하겠다는 그런 정신이 아주 투철해서 작전에 지장만 없다면 흔쾌히 빌려줬어요." 결과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어느 기업을 막론하고 한국 노무자들의 파업 이유는 일부 근로조건이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역시 임금에 있었다. 현지 공관에서는 포괄적으로 '처우문제'라고 보고했지만 당시 국내 노무자 임금이 월 평균 100달러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많은 노무자가 월남 러시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임금이 얼마였든 그것은 아무런 기준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외국 업체 소속으로 나온 노무자들과 비교를 했다. 예를 들어 캄란 준설공사만 해도 미국 일본 호주 등 7개국에서 21척의 준설선이 작업하면서 받는 임금이 한국 업체 소속으로 나온 노무자들과 200달러에서 400달러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을 강력히 제기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현황까지 들고 나오자 정부로서는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신상철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최대한 신속히 수습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도록 주문하면서 모든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태를 파악해 보고하라 했던 것이 정부의 당혹감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 때문에 파업현장으로 나간 신 대사도 애를 먹었다면서 그러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애국심에 호소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더라고 했다. 그만큼 정부의 대외 인력수출이 주먹구구식이었고 무원칙이었다는 얘기였다. "폭염이 쏟아지는 머나먼 월남 땅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전쟁의 화염 속으로 달려온 여러분은 누구 못지않은 애국자들이다. 대통령께서도 여러분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계신다. 모든 것이 어려운 여건에서 오직 잘살아 보자는 염원과 국가의 경제부흥을 위해 땀을 흘리는 여러분한테 결코 헛된 노력이 안 되도록 대사인 내가 모든 노력을 다해 여러분 입장에 서겠다. 이곳에서 여러분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하면 그동안 높은 평가를 받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온 한국인들이 월남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겠느냐. 여기서 파업은 한국하고 근본적으로 다르다. 처음으로 외국에 대규모 인원이 진출을 했는데 모범이 돼야지 이래가지고는 회사도 클 수가 없다. 물론 당신들이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9-11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8] "정부선 노무자 파업 진작에 예상했었지"

66년 5월 26일 이때부터 한진 공식 명칭은 '한진상사 월남지사'였다. 새로운 수송장비와 하역장비를 대규모로 발주해 퀴논항에 쏟아 내린 것은 퀴논을 중심으로 수송사업을 하되 물량만 있으면 월남 어디든 가겠다는 야심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 상무도 그 본보기를 퀴논항에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수송대원 100명이 일주일 걸린다는 일을 32시간 만에 하역을 마쳤다면 굉장한 강행군을 했군요. 그런 광경이 미군 사령부에도 보고된 겁니까? "월남이 생기고 그렇게 많은 새로운 장비들이 투입되는 건 처음이었을 거고 엄청난 광경인데 현장에 미군 수송부대원들이 있었으니까 상부에서 보고는 받았겠지요. 나도 사이공에 가서도 얘기를 하고 부사령관한테도 직접 보고를 했어요. 우리가 100일 약속을 했는데 96일 만에 장비가 도착했으니 능력이 이 정도다 하는 것도 알리면서 자신감도 보여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역시 수송 경험이 있는 회사라 다르다면서 기대가 된다고 그래요. 그런 반응이 나오니까 기분이 좋잖아요. 그때 내가 무리한 요구를 좀 했는데 '이제부터 당신들을 제대로 도와주려면 군용비행기를 막 타고 다닐 수 있는 패스가 있어야 되겠소. 그것 좀 주시오'라고 했어요. 민간인으로서 군용비행기를 타고 다니겠다는 게 말이 돼요? 정신 나간 소리지. 그런데 사령부에서 볼 때 장비들도 엄청나게 들어왔지 뭔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전쟁을 하자면 서둘러야 되지 생각보다 쉽게 오케이야. 하하하. 그 덕분에 전쟁하는 나라에서 민간인이 군용비행기 얻어 타고 돌아다닌 건 내가 처음일 거요. 흐흐흥." -결과적으로 약속한 기일 내에 장비는 준비를 완료했지만 수많은 노무자의 숙소나 근로 조건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불행한 일이 일어났던 걸로 압니다만…. "에이~잘나가다가 뭘 그런 얘기를 해. 그것도 역사니까 해야 되나? 한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기업 모두가 그랬지만 우리 한국이 건국 후 오늘날까지 경제적으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걸로 이해해줘야 합니다. 어느 나라나 불행한 경험 없이 성장한 나라가 없잖아요. 미국도 그랬고 영국도 그랬고 러시아까지도 격한 파업이 있었으니까. 성장 과정에서는 어느 나라나 다 있었는데 해외 진출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던 60년대 그 시절에 파업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게 교훈이 됐고 수업을 받은 셈이니까 나쁘게만 평가할 게 아니라고 봐요." 조 상무는 기억하기가 유쾌한 일은 아니라면서 성장 역사의 한 과정에 있었던 일인 만큼 이해를 돕기 위해서도 한 번쯤은 짚어야 되겠고 정확한 전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월남에서 있었던 일은 시점 상으로 보면 조금 뒤에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보면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잠시 스트라이크가 있어서 신상철 대사가 수습하느라고 참 많이 수고했고 우리 회장도 최선을 다해 최대한 노무자들 불편이 없도록 해주겠다고 애를 무척 썼어요. 그게 되돌아보면 경험이 없었던 내 탓입니다. 왜 불만이 나왔느냐 솔직히 처음에는 장비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엇보다 장비가 가장 급하니까 작업자들 숙소는 내 머릿속에서 좀 뒷전으로 밀려 있었어요. 그랬는데 비행기로 막 수송이 되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수백 명이 들이닥칠 텐데 기본적인 막사와 침구도 준비하지 않았으니 이거 문제가 생기겠구나 그래가지고 즉각적으로 한국군과 미군의 도움을 받아 신속히 해결했지요. 근데 파업은 그 후에 일어났잖아요. 나도 할 얘기가 많지만 가만 보면 오해도 있었고 군중심리도 작용했다구요. 어쨌든 다른 기업체 현장이지만 노무자들이 웅성거리니까 우리 노무자들도 눈을 돌리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외국 기업들하고 비교도 하게 되니까 몇 사람이 나서더니 난데없이 인간 대접을 안 한다느니 임금이 어쩌느니 그랬던 거예요. 그것도 금방 수습은 됐지만." 사실 기업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정부는 노무자들의 파업을 진작부터 예상했었고 그런 점에서 보면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부 기관이 외국 회사들을 대신해 파월 기술자들을 모집하면서도 편차가 심한 임금 부문에서 심각성을 우려했지만 불상사를 막을 분명한 제도적 보완책도 없이 출국시켰고 그것이 결국은 파업의 단초가 됐다고 보면 정부의 책임도 큰 것이다. -근로자들 스스로 오해를 풀어서 신속히 수습된 겁니까? "물론 개인마다 기대치가 있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우리 회장이나 나나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처음 대규모 인원을 끌고 해외에 진출하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해 준비가 소홀했던 건데 가령 그 많은 인원이 일시에 들이닥치니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더구나 덥고 말라리아는 있고. 그렇지만 노무자들도 마찬가지였거든? 그들이 준비해 온 걸 보면 식기나 민간인 담요 정도였단 말이죠. 그런 걸 봐도 그 사람들 역시 처음이라 제대로 준비를 못했으니 우리도 부족했던 걸 그때 느낀 거지만 서로 이해한 거예요." -군부대의 도움도 받았습니까? "물론 긴급히 본사에 요청해서 준비가 되지 않은 것들은 본국에서 수송해왔지만 서울에서 보내오기 전까지는 마련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십자성부대 사령관이 이범준 전 교통부장관이에요. 내가 군대 덕을 참 많이 봤다고 생각하는데 다급해서 그 분을 찾아갔죠.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가 준비할 때까지 침구 같은 것 좀 대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사실 그때 상황은 급했으니까. 우리로서는 비상사태나 다름없었거든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9-04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7] 정부서 보증 서줘도 돈 없어 사채 동원

1965년부터 72년까지 정부가 집계 발표한 월남 진출 한국인 기술자는 2만5300여 명으로 그중에 외국 기업체에 취업한 사람이 1만5770여 명 국내 60개 기업에 취업한 기술자가 9560여 명에 이른다. 특정 기술직으로 보면 외국 업체 취업자가 국내 업체 취업자보다 많게 나타났지만 여기에 단순 노무자들을 포함하면 국내 업체 취업자가 당연히 많을 것이고 그 숫자는 3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문제는 그들이 똑같은 월남 현장에서 일하면서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의 임금 격차를 비교하게 됐을 때 과연 어떤 파문이 생길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간단히 여길 일이 아니었으며 그 점을 정부는 심각히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우려 때문에 한진의 대규모 인력 수출 문제가 정부 내에서도 신중히 검토됐지만 어쨌든 조중훈 회장은 문제를 풀어냈다. 그런 과정에서 조 회장이 정부에 어떤 약속을 했는지 그것은 공개하기 어렵다. 다만 장기영 부총리가 조 회장을 많이 도와줬다고 했으나 그것은 조율이 끝난 후로 보인다. 그 시점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조 회장이 장 부총리를 만나 인력 수출도 타이밍이 있는 만큼 노무자들이 적기에 투입돼 일할 수 있도록 빨리 정부가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고사에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백일불식(百日不食)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루 작업을 못하면 백일 먹을 양식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자 정부 내에서 결국 승인하는 분위기로 선회했던지 장 부총리가 그랬다. "각하께서도 기업들의 애로 사항에 대한 현황을 보고 받으시고 빨리 도와주라는 말씀이 있으셨고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도 죄다 조 사장(조중훈) 칭찬을 많이 하니까 곧 될 겁니다. 정부가 적극 지원할 때 (한진을)많이 좀 키워보세요"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면서 장 부총리는 덧붙여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정부가 사업을 해주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내세우려고 했다. 장 부총리가 관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한진이 정부 덕으로 돈벌이를 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인지 조 회장이 정색을 했다. "부총리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정부가 사업을 할 줄 안다면 사업을 막는 법은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되받은 것이다. 정부가 사업을 해주는 것은 고사하고 인력 수출조차 막고 있다는 것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오히려 일침을 가했던 셈이다. 어쨌든 조중건 상무는 100일 내에 수송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초조감 때문에 잠시도 텔렉스 앞을 떠나지 못했다면서 회고를 이어 나갔다. -인력을 송출하는 일도 수월한 게 아니었겠지만 수송 장비나 하역 장비에 투자되는 자금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그 당시 엄청난 물량이 월남에 투입됐잖아요? "그게 사실은 굉장한 문제였습니다. 고비였다고 할 수도 있지요. 한진이 그 당시 국내에서 수송사업으로 조금 벌었다고는 하지만 트럭만 하더라도 수백만 달러어치를 사야 되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자금으로 그게 턱이나 됩니까. 있는 돈 없는 돈 사채까지 썼어요. 그렇게 하니까 시중에서는 조 회장이 사채놀이를 한다고 소문이 나요. 하하. 근데 사채 그거 무섭습디다. 사채가 무섭다는 건 이자 때문 아니겠어요? 우리 회장의 얘긴데 '그 놈의 사채는 비 오는 날도 없고 눈 오는 날도 없고 공휴일도 국경일도 쉬는 날도 없이 계속 이자가 붙더라.' 이러는 겁니다. 하하하. 그렇지만 장비는 사야 되니까 사채를 많이 동원했죠." 조 회장의 얘기를 빌리면 정부에서 쓸 수 있는 가용외화가 4700만 달러밖에 없었을 때 정부 보증으로 300만 달러를 차입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에 썼다는 것일까. "300만 달러…? 그것도 거기에 때려 넣었겠지요. 장비가 보통 비싸야지. 정부가 보증은 해줘도 돈은 없었단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정부의 신용장 장사고 정부의 신용대출인 셈이지. 정부 힘으로 돈을 빌리는 거니까요. 그런데도 워낙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니까 숨이 탁탁 막히지요. 시간은 없고 정말 우리 회장이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거기다가 현장은 내가 책임지고 있었는데 수송은 경험이 있다지만 하역은 처음 아닙니까. 원래 하역을 하자면 부두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퀴논에 부두가 없으니 배를 갖다 댈 수도 없고 결국은 바지선을 끌어다가 물자를 하역시켜 그걸 트럭으로 다시 옮겨 수송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와요. 그렇지만 방법을 찾아놓고 보니 바지선이 있나? 미쳐요. 회장한테 또 연락했죠." -조 회장님이 참 답답하고 기가 막힌다고 하셨겠는데요? "나 같아도 뭐 이런 것들이 있나 했을 거야 하하. 근데 희한해요. 회장은 화를 내거나 꾸짖는 게 없었어요. 대단한 양반이야. 내가 없다는 소리만 자꾸 하니까 우리 회장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거기(월남)에는 없는 것밖에 없네? 그럼 있는 건 뭐가 있느냐?' 그래요. 하하하. 그러면서 부랴부랴 홍콩에 있는 바지선을 구입해 퀴논까지 보내오는 거예요. 그게 또 보통 일이 아니라구요. 바다를 건너오는 것 아닙니까. 풍랑이라도 만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런 걸 보면 회장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운은 타고났다 싶어요. 좌우간 96일 만에 첫 배가 퀴논에 도착하는데 참 눈물 납디다. 사람은 비행기로 오기 시작했고 하역할 장비와 트럭이 96일 만에 퀴논 부두에 도착했는데 눈물이 막 나. 그때부터 막 실어 내리는 겁니다. 그게 엄청난 물량이고 진짜 감동적인 장면이지요." 10여 명의 직원과 함께 미군 수송부대원들이 동원돼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고 했던 1470t의 전쟁물자 하역 작업을 한진은 32시간 만에 끝내버린 것이다. 작업현장을 지켜본 월남 사람들은 물론 미군들도 '저게 사람들인가?' 했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었다. 이호 객원기자·작가

2009-08-28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6] "박 대통령 찾아가 인력 수출 부탁했죠"

-조 회장님이 박 대통령과 정책적인 문제를 건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때 이미 가까이 있었다는 겁니까? "펜타곤 갔다 와서 정부 보증도 받아냈으니까 우리 회장도 박 대통령 열정을 잘 알잖아요.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인들하고 가깝다고 말하면 사회가 이상해서 정경유착부터 먼저 떠올리는데 그 당시는 그게 아니에요. 박 대통령이 얼마나 경제부흥에 전념했습니까. 매일 건설현장 체크하고 매일 기업들이 달러 벌어올 수 있도록 하라고 경제부처 독려하고. 그런 차원이라구요. 솔직히 한진 입장에서는 월남 진출이 사운을 건 도전이었지만 회장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집념 때문에 진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마음이 반은 됐을 겁니다. 물론 5.16 이후에 내가 박 대통령을 비롯해 JP(김종필)부터 박종규씨까지 혁명주체 20여 명을 우리 회장한테 소개를 한 적이 있고 같이 술좌석에도 참석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어른의 집념을 누구 못지않게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워낙 급했으니까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한 거예요." 조 상무는 정부의 움직임까지는 모르고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정부는 이미 65년 3월 당시의 내각조정실 김좌겸 차장 엄익호 상공부 공업2국장 강중경 국방부 과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사이공에 파견해 시장조사를 하면서 인력수출에도 대비하고 있었다. 정부는 65년 월남 수출 목표액을 1400만 달러로 책정해 놓고 있었지만 김좌겸 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그들의 조사보고서대로 만약 미군의 지상 장비들을 정비한다거나 수송 하역 보관 등을 위한 기술자 파견이 가능하다면 외화 획득이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까지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시장보고서가 긍정적으로 나오자 힘을 얻은 정부는 한.월 간의 '경제각료회의'를 제안하고 1차 회의를 거쳐 66년 1월 11일부터 3일간 사이공에서 2차 경제각료회의를 열어 장기영 부총리를 수석대표로 해서 원용석 무임소장관 김정렴 상공차관 그리고 월남정부에서 트롱 타이톤 경제장관과 부서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송 문제까지 거론하며 외화 가득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특정업체 한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수송이라면 당시로서는 한진밖에 마땅한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도 한진을 거론한 셈이었고 더구나 한진은 정부가 기대하는 외화획득 기업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만큼 한진이 수혜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박 대통령과 조 회장님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습니까? "5.16 직후지요. 그 당시 혁명주체들이 회의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어 자하문에 있던 우리 회장 별장에서 자주 모였어요. 그때만 해도 자하문 그쪽은 벌판인데 돌담을 만들고 근사하게 별장을 지어놓으니까 미군들이 선물한 양주도 있지 고기도 있지 곧잘 모인 거지요.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경제 문제로 고민하시는 걸 많이 들었을 거 아닙니까. 우리 회장이 또 자기는 웃지도 않고 남을 웃기는 입담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하. 그러니까 친해지지. 내가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미국 포병학교에 있을 때 박 대통령하고 같이 생활했잖아요. 그분이 일본말로 하면 마지매(眞面目.진지하고 성실함)예요. 선생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날 아주 아껴주셨거든. 하여간 그래 가지고 우리 회장이 박 대통령도 만나고 장기영씨도 찾아가고 장기영씨가 무척 도와줬다고 들었지만 좌우간 막 서둘러서 결국 인력수출은 통과가 됐어요. 그 덕분에 기술자 운전수 하역인부들까지 우리가 전부 모집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다. 66년 이 당시에는 이미 해외개발공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65년 10월 6일 보사부의 감독을 받는 '한국 해외진출진흥회'가 설립됐다. 같은 해 11월 3일 재단법인으로 개편돼 76년 4월에 '해외개발공사'로 명칭이 바뀌지만 이미 해외진출진흥회 설립 첫해부터 미국 벡텔사와 알코사에 불도저 기술자 3000명의 인력을 수출해 왔듯이 설립 목적은 명칭이 바뀌기 전이라도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한진의 인력수출은 정부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면서도 제동이 걸렸을까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벡텔과 알코사에 보낸 인력은 기술자들이었고 한진은 주로 단순 노동력이었다는 것뿐인데. 그러나 그런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한국인 노무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비로소 정부가 왜 여권 발급에 제동을 걸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내막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조 상무는 여권 발급에 필요한 신원 문제를 언급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여권을 내주기가 어렵다면 해당자만 제외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에 여권 발급이 원인은 아니었다. 정부는 사실상 냉가슴을 앓고 있었지만 이유가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언급됐지만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될 때 해외개발공사(해외진출진흥회)를 통해 외국회사로 취업 나간 기술자들은 1인당 500달러의 계약이었다. 기술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정보조직 모집이 최저 월급 375달러였고 어떤 외국회사는 최고 1000달러라는 안내문까지 붙여 놓았다. 그런데 회사마다 임금이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한진은 얼마가 될지 의문이었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 업체에 진출한 한국인 기술자들과 한국 업체에 진출한 기술자들이 똑같은 월남에서 일을 할 때 정부는 임금과 수당 차이 때문에 심각한 마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정부가 달러를 많이 벌어들일 수 있는 기업으로 한진을 선두기업으로 분류하면서도 한진의 임금 수준 때문에 인력수출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8-21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5] '운송회사가 하역까지 맡아 속다탔죠'

남의 나라에 가서 돈을 벌어온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 주머니의 돈을 내 주머니로 빌려서 넣기도 온갖 머리를 써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다급한 현안이 경제부흥이고 정부의 독려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익창출이 기업의 최종 목표라 하더라도 머나먼 월남 시장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어지간한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수의계약을 위해 조중건 상무는 미군사령부의 계약관 교체를 시도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젊어서 그랬는지 그는 계약관 교체 요구가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조 상무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미군에서는 미군 인사 발령을 한국인 찰리 조가 낸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것이 한국군사령부와 우리 대사관에도 전해진다면 한진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의계약을 했다면 원청사는 미군이 됩니까? "원청과 하청의 개념이 아니지요. 우리 단독계약인데 따지자면 미군이 원청사가 되지만 미군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 맡아서 해주는 직영회사가 되는 셈이에요. 건설을 한 사람들은 미국의 RNK라고 미국의 건설업체 하청을 했지만. 그러니까 우리 경우는 미국하고 직접 원청 계약을 해서 우리가 직영을 했기 때문에 하청에 따른 시끄러운 건 없었어요. 인력도 자체적으로 전부 모집을 하고. 우리가 주로 했던 일은 수송을 중심으로 트럭을 우리가 사서 운전 정비 하역장비 등을 계약하고 물건은 뭐가 어느 위치에 얼마가 있다 하는 검사요원들까지 우리가 배치하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벌써 40년이 넘은 지금에서 되돌아봐도 조중훈 회장이 월남과 미국을 위해 은연중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던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코멘트가 조 상무 얘기 속에서 나오고 있는 셈이었다. 자유 월남을 지키고 탄약과 군수물자를 긴급 수송해 미군의 승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조 회장은 한진 스스로 갖추도록 지시했다는 뜻이었다. -100일 이내에 모든 준비를 갖추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사이에 준비는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게 정말 우리 회장이 할 일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 수송은 전문업체였지만 하역은 경험도 전문지식도 없었어요. 그래 가지고 나로서는 한두 번 들어갔나? 거의 월남에 있으면서 회장하고 연락만 하는데 회장한테 긴급히 알렸지요. 문제는 하역이다 회장이 해결을 해줘야 되겠다고. 근데 회장이 그때는 하역장비도 모르고 하역작업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직접 잠바 걸쳐 입고 인천에 나가서 하역하는 걸 살펴보고 배우는 겁니다. 일본 요코하마에도 가서 도대체 하역이 무엇인지 견문을 넓히고. 나는 또 100일 동안에 해결 못하면 페널티를 물어야 되니까 일본 회사 미국 회사들을 쭉 조사해서 하역장비들을 발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미국 회사는 장비 주문을 하면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간만 100일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걸 월남까지 수송해 온다고 하면 또 한 달 이상 걸릴 거 아니오. 큰일 났어요." 조 상무로서는 당장 하역장비부터 속을 태웠다고 했다. 주문에서 생산까지 그리고 월남으로 이동하려면 아무리 계산을 해도 약속했던 100일 안에 모두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큰소리치면서 제안서를 냈던 것이 아찔할 정도로 막막했고 또 회장에게 긴급 타전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계산을 해보니까 약속을 못 지켜 40여만 달러 변상을 하게 생겼는데 돈도 돈이지만 첫 사업부터 신용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알아보지도 않고 제안서부터 낸 것이 경솔했다 싶기도 하고 낙담도 되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겁니다. 누워 있으면 박정희 대통령과 장기영 부총리한테 우리 회장이 질책을 듣는 것도 상상이 되고 미치겠어. 부사령관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고 워커 중령 그 녀석도 비웃는 것 같고 말이지. 근데 우리 회장이 참 빨라요. 형이지만 그때 회장을 진짜 다시 봤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오사노 겐지라는 일본의 유명한 경제인이 있습니다. 그 양반이 이스즈(ISUZU) 자동차 대주주인데 우리가 한국에서 버스사업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그분한테 회장이 직접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랬더니 일본 사람이 주문해 놓은 걸 오사노 겐지 그분이 웃돈을 주고 우리한테 빼주더라는 거지요. 그걸 아무나 할 수 있어요? 나는 속만 타들어갔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 걸 볼 때 아무나 회장 하는 게 아니구나 싶고 회장이 가만 보면 결정적일 때 꼭 힘을 써요. 그러니까 그만한 인맥과 인덕이 있었던 거예요." 조 상무는 첫 시장을 열기까지가 제철소 고로에서 첫 쇳물을 쏟아낼 처녀공(處女孔)을 여는 과정도 이렇게 힘든 준비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까 싶더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하역장비는 준비가 됐다는 조 회장의 연락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또 노무자들 모집이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수송계약을 해놓고 시동을 걸려니까 이건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게 없어요. 노무자를 데려온다는 게 또 걸림돌이야. 현지에서는 누가 베트콩인지 모르니까 아예 모집을 할 수가 없는 거고 더구나 1달러라도 우리 국민이 벌도록 해야 하니까 국내에서 데려와야 되겠는데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모집 자체가 힘들게 돼 있는 겁니다. 해외에 나가서 하는 사업 아닙니까. 당시만 해도 여권을 만들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더라 그거지요. 그런 걸 보면 정부가 참 답답한 것이 입만 열면 애국하자 달러를 벌어와야 된다고 하면서 대문을 걸어두고 있는 꼴이니 말이지. 해외로 돈 벌기 위해 나간다는데 그까짓 여권 만드는 게 뭘 그렇게 제약이 많고 까다로워야 됩니까. 6.25 때 부역 나간 사람이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돼. 그땐 그랬다구요. 그래서 다급하니까 우리 회장한테 박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했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8-14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4] '베트공과 경쟁 입찰하라니' 강력 대응

-미군 계약관을 누가 바꿔야겠다는 겁니까? "내가 바꿔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하하하. 순간이지만 어떡하면 앵글라 부사령관도 열을 받게 만드나 그걸 머릿속에서 굴리는 거예요. 그래야 워터라는 그 친구를 교체할 거 아니오. 그래가지고 대뜸 그랬어요. '계약이나마나 실망했다. 내 제안서를 봤다니까 얘긴데 나는 미군을 도와주려고 왔고 미군은 베트콩을 전멸시키려고 여기까지 와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계약관이 베트콩하고도 경쟁 입찰을 부치겠다고 하니 도대체 계약관의 국가관을 알 수가 없고 내가 따낸다고 한들 그 계약관하고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하하하. 말이 되잖아요? 그랬더니 이 양반이 베트콩 소리에 흥분해가지고 당장 계약관을 부르는 겁니다. 근데 마침 워커라는 그 녀석이 자리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내가 당신 제안서도 봤다. 우리가 원했던 조건이다. 내가 계약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기다려!' 완전히 내 얘기가 먹힌 겁니다. 하하하." -계약관이 베트콩과도 경쟁입찰을 부치겠다는 얘기를 정말 했습니까? 그건 군법에도 넘길 수 있는 발언인데요. "물론 워터 그 친구 입에서 베트콩을 경쟁입찰에 부치겠다고는 안 했지. 그렇지만 월남 업자도 포함시킨다고 했으니까 누가 베트콩인지도 모르고 전쟁을 하는 마당에 입찰자가 베트콩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어요?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는데 어떡할 거요 하하하." -부사령관이 계약관의 주장은 들어보지도 않고 기다리라고 할 만큼 호의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대접이군요. "내 제안서도 마음에 들었겠지만 파격적인 대접을 해준 건 사실이지요. 호텔로 돌아와 있으니까 곧바로 워터한테서 전화가 오고 난리예요. 일부러 안 받았어요. 전화통에 불이 나요. 결국 메시지를 남기는데 내일 제일 먼저 자기부터 만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보나마나 부사령관한테 혼이 난 거야. 군대에서 3성 장군이 중령 세워놓고 따질 리도 없고 베트콩하고 경쟁입찰하라고 했느냐고 확인할 것도 없이 호통부터 친 거예요 하하하. 점심을 느긋하게 호텔에서 먹고 이제는 계약 내용을 어떻게 만드느냐를 생각하는 겁니다. 오전까지는 계약관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이제는 역전이다 이거죠. 더구나 내가 전투담당 부사령관 병참담당 부사령관 두 사람을 다 아는데? 굉장한 빽이 있다 이거지 하하하." -결과는 원했던 대로 됐습니까? "결국은 그렇게 됐는데 그 친구가 결과적으로 교체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 탓이야. 우리가 농담할 때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봐주라'고 그러지요? 그게 베풀 수 있을 때 베풀라는 뜻도 있지만 겸손하라는 거거든? 자기 위치가 계약관이면 계약관이지 부사령관 입장도 배려해서 방법을 찾아보자든지 겸손하게 처신해야지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일언지하에 딱 자르고 말이야. 하여간 낮잠까지 잠깐 자고 3시10분에 들어갔어요. 펄펄 뛰고 난리야. 부탁하러 오는 놈이 늦게 왔다 이거지. 자기도 자존심이 있을 테니까 펄펄 뛰는 것까지는 나도 이해했어요. 근데 막상 계약 협의에 들어가니까 똑같아. 어찌나 까다롭게 구는지 말이에요. 부사령관에게 수의계약으로 주라고 명령은 받았는데 속은 뒤틀려 있는 거지요. 그러니 얘기가 돼요? 조건도 여간 까다롭지 않아요. 없는 조항도 꺼내고 말이야. 그 친구가 그렇게 나오는데 상대를 해봐야 남는 게 없겠어. 끝까지 피곤하겠고. 솔직히 우리 장병들은 자유 월남과 미군을 돕기 위해 피를 흘리고 싸우지만 우리 같은 기업들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민족자본을 형성할 수 있도록 최대한 벌어야 되는 거 아니오. 박 대통령의 각별한 당부도 있었고. 당시 내 나이가 서른넷인데 혈기왕성할 때지. 워터는 쳐다보기도 싫고 다시 위에다 얘기를 하는 겁니다." -(웃으며)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부사령관도 피곤하다고 했겠습니다. "아니지 내가 오히려 저런 친구를 상대하려니까 피곤하다고 그랬는데? 하하하. 그랬더니 계약처장을 만나래. 대령이에요. 그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부사령관이 얘길 했으니 잔소리가 하나도 없고 뭘 도와줄까 물어요. 됐다 싶어서 첫마디에 계약관 좀 바꿔줄 수 없느냐고 그랬지. 일을 얻으려고 하는 놈이 오히려 담당자를 바꿔 달라고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간덩이가 부은 거지만 한국 사람은 첫 인상을 구겨놓으면 원래 일을 못하는 거 아니오. 그랬더니 운이 좋으려고 그랬던지 마침 부산에서 출항한 배로 흑인 소령이 와 있다는 겁니다. 즉각 좋다고 했지요. 그러고 흑인도 그땐 한국 사람을 무조건 좋아해요. 왜 총에도 안 맞고 자기 친구들이다 이거지. 하하. 그래가지고 그 친구를 불러서 만나니까 마침 미시간 대학 출신이에요. 아이구 잘됐지 나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다 그랬더니 미국 대학시절부터 얘기가 나오는데 연애하던 추억담까지 곁들이고 죽이 착착 맞는 거예요 하하하. 결국 수의계약을 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 상무의 얘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신상철 전 대사는 의미 있는 회고를 했다. "수의계약을 하기 훨씬 이전에 우리 정부는 어떡하든 월남시장에 우리 인력을 쏟아 부어야 된다는 정책회의가 있었다구요. 장기영 부총리가 직접 대표단을 이끌고 날아와서 월남 정부 고위층을 만나고 웨스트 모얼랜드 미군 사령관도 만났어요. 나도 배석을 했고. 그 자리에서 많이만 맡겨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모얼랜드 사령관이 얘기를 선뜻 안 합디다. 그러더니 우리가 한.미 관계도 거론하고 한.월 간의 친선도 언급하면서 자꾸 요구를 하니까 담당 부사령관이 충분히 검토할 거라고 해요. 그런 걸로 봐서 부사령관이 상당한 권한이 있었던 모양입디다. 그 후에 보니까 조중건씨가 담당 부사령관을 만나고 다니더니 계약을 따내요. 저 친구가 뭔데 저런 기술이 있나 했지만 하하."〈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8-07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3] 깐깐한 미국 계약관과의 기싸움 한판

먹이가 눈에 보이면서 조중건 상무는 흥분될 정도였다고 했다. 퀴논 항에 쌓여 있는 물량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형인 조중훈 회장이 황금 광맥을 발견했다고 박정희 대통령과 장기영 부총리에게 보고해 흥분하게 만들었던 곳이 바로 여기구나 싶더라는 것이다. 사실 정부로서는 기업인들에게 달러를 벌어들이라며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는 입장이었다. 그럴 때 선박에 실린 채 하역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곧바로 한진에는 금광이었고 정부엔 달러 박스가 되는 셈이었다. 조 상무는 시동을 건다. 당장 계약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지체 없이 미군 전투 부사령관에게 제안서를 썼다. 군 지휘관들에게는 민원이 됐건 건의사항이 됐건 뭔가 근거 서류가 있어야 움직인다는 것을 조 상무는 알고 있었다. "장군 퀴논에 가서 보니까 미국인들이 하역을 하고 수송을 한다는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답답하던데 우리 한진 같은 수송 전문회사에 맡기면 전쟁 목적을 최대한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겠다. 우리와 수의계약을 하면 100일 내에 수송장비와 하역장비 인원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쟁 예산을 절약하는 길이고 결과적으로 미국 납세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아니냐. 우리가 100일 안에 수송에 필요한 일체를 가져오지 못해서 작업에 차질을 빚게 된다면 하루 1만 달러씩 변상하겠다." 한마디로 과감한 제안을 한 셈이었다. 어쩌면 겁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하역장비는 주문생산이다. 더구나 생산이 완료된 시점에서 선적한다고 해도 100일 가까이 소요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 상무는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시작부터 베팅하는 것 같았다. 여하튼 그래 놓고 조 상무는 계약관을 찾아간다. 실무자부터 만나 탐색해 보고 시작할 참이었다. 그러나 계약관인 '워터'라는 중령은 원칙주의자였다. 한마디로 수의계약은 '웃기지 말라'는 식이었다. 모든 계약은 경쟁입찰을 통해 최저가로 써낸 업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더구나 입찰에는 미국 회사와 필리핀 일본 그리고 월남 업체들도 참여시킨다는 얘기였다. 이 부분에서 계약관의 주장과 일치하는 증언이 있다. 수의계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계약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라 월남 정부의 강력한 요청이 이미 미군 사령부에 접수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월남 정부가 미군 사령부에 유감을 표명할 정도로 수의계약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오는 것은 67년 무렵부터지만 한진이 수의계약을 요구할 때도 월남 정부가 못마땅하게 주시했다는 것이 신상철 전 대사의 회고였다. "사실 월남 정부가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 때문에 한진은 물론 많은 업체와 파월 기술자들이 심리적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티우 대통령이 굉장히 박 대통령을 좋아했어요. 그래가지고 구엔 칸 정권 때도 얘기는 있었지만 한국 방문은 티우 대통령이 먼저였단 말이죠. 그럴 정도로 박 대통령을 좋아했는데 66년 초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다가 우리 장병들이 1년 임기를 마치고 현지에서 재취업이 막 이루어지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월남인들 취업난이 심해질 거 아닙니까. 군인으로 와서 귀국도 하지 않고 현지에서 곧바로 취업하니까 말이죠. 처음에는 말이 없더니 외교문제가 되는 겁니다. 강력한 제동을 걸고 나오면서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 그거지요. 월남인들도 취업을 시켜줘야 할 거 아니냐 그겁니다. 상당히 심각했고 미국 대사관과 미군 사령부에도 문제점을 제기한 거지요." 조 상무는 난감했다. 미국 업체나 일본 업체들과 경쟁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월남 사람과의 경쟁은 이길 자신이 없었다. 수송과 하역은 반 이상이 인력인데 노무자들 급료 수준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결국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조 상무로서는 마지막 히든 카드를 생각하면서 우선은 하인카스 부사령관을 찾는다. "방법이 없겠다 싶어요. 현장은 다 돌아봤고 노다지가 쌓여 있으니까 계약이 관건인데 워터라는 중령이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깐깐하니 어떡합니까. 하인카스 부사령관을 만나러 갔죠. 내가 보낸 제안서를 봤느냐니까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지체하지 말고 당장 계약관을 만나 협의하라고 그래요. 남의 속도 모르고 만나면 뭘 해요. 만나보나 마나 그 친구가 얘기한 것이 있는데 뻔하잖아요. 그렇지만 혹시나 부사령관 앞에서는 마음이 변할지 모르겠다 싶어서 그 친구를 부사령관실로 불렀어요. 당황하더구먼. 근데 뭐 역시 수의계약은 어렵다는 겁니다. 부사령관 앞에서는 분명하게 말을 안 하고 어물어물 넘기면서 병참부서로 가자고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서니까 딱 규정대로 입찰에 부쳐 최저가를 택하겠다고 강조하는 거야." -원래 미국 사람들 원칙적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전쟁 중이고 군인들 아니오. 융통성이 있어야지 몇 달씩 전쟁물자를 쌓아 놓고 있으면서 무조건 원칙대로 할 일인가? 전쟁에 원칙이 있어요? 하여간 그 녀석하고 얘기한다는 자체가 기분 나쁜 거야. 백번 이해를 한다고 해도 그 친구하고 협상한다는 건 승산이 없어요.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누룽지만 놓고도 승부를 거는 월남 업체보다 우리가 저가로 입찰할 수 있겠어요? 해봤자 지는데. 그때까지는 내가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안 찾아갔고 마지막 카드로 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도리가 없어요. 사령부를 나와서 고민하다가 10여 일쯤 지나서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그 사이에 하인카스 부사령관한테 보냈던 제안서도 다 검토했고 내 친구인 마이클 장군의 텔렉스도 받았다면서 당신이 찰리 조냐고 왜 이제야 찾아왔느냐 계약은 했느냐? 이러면서 아주 반갑게 맞아 주더라구요. 그런 분위기가 되니까 그 순간에 계약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나는 겁니다. 워터한테 퇴짜를 맞았다는 소리는 못하겠고 열불이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31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2] '민간인' 조중건 미군헬기 '빌려달라'

-그런데 미군은 탐색과 섬멸이라는 전술을 주장했다는 말씀이군요.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면 그렇게 했겠지요. 나는 그게 아니니까 우리가 독자적으로 하겠다고 싸운 거고. 미군들은 탐색과 섬멸이 전략전술이니까 밀림에 들어가서 슬슬 찾고 다닌다구요. 탐색하는 거지요. 베트콩들은 다 지하 동굴에 숨어버리고 움직이지를 않는데. 그러니 전과가 별거 없어요. 미군이 지나가고 나면 마을 일대를 다시 활보하는 겁니다. 백년 해 봤자 끝이 안 나요. 그러다가 이놈들 혼을 좀 내줘야 되겠다 하면 전부 총만 딱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밀림이라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요. 그러다가 자기 앞으로 베트콩이 지나가는 게 보이면 딱 한 방을 쏴요. 두 방 이상은 안 쏩니다. 두 방 쏘게 되면 위치가 발각되니까 딱 한 방만 쏴요. 그러면 한 명 죽는 거예요. 적막이 흐르다가 저쪽에서 또 한 방 총소리가 나면 한 명 죽어요. 그러니까 정말 무슨 유령이 전쟁을 하는 것 같다구요. 물론 포탄을 쏘기도 하고 대대적인 폭격도 하지만 그럴 땐 전부 지하 동굴 깊숙이 들어가 있으니까 끄떡도 안 해요. 미군들이 물러가면 다 나오고. 그렇게 되니까 주민들이나 정부군이나 미군에게 절대 협력을 안 합니다. 인민들 속에 게릴라들이 있는데 협력을 했다가는 미군이 돌아간 후에 반역으로 몰아 그 자리에서 재판하고 맞아 죽는데 어떻게 협력을 해요." -한국군은 어떤 방법으로 분리 작전을 합니까? "우리는 주민을 보호하면서 선무작전을 펼친 거죠. 그걸 평정사업이라고도 했는데 결국 주민들의 협조도 얻고 성공했죠. 미군들은 베트콩 집결지인 부락을 중심으로 기지를 형성하고 거기다 포격을 가하고 헬리콥터로 쑥대밭을 만들지만 베트콩은 하나도 안 죽고 노인네들 아낙네들 어린애들만 당해요. 근데 우리 한국군의 캐치프레이즈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거였다구요. 미군사령관이 100명의 베트콩을 놓친다는 것은 싸움을 안 하겠다는 거 아니냐고 항의도 해왔지만 그건 당신들 생각이고 우리 전략은 다르다 그거죠. 우리 선무작전이 당시 월남 신문에도 크게 나고 월남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워하고 그랬지만 우리는 베트콩 마을이 있다 하면 완전 포위해놓고 방송만 하는 겁니다." -런던타임스에서 그 당시 파월 한국군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군에게 월남전을 맡겼더라면 6개월 내에 다 종결되었을 것이라고 썼죠. 단순히 베트콩을 유인하기 위해 선무활동만 한 게 아니라 주간에는 대민 활동까지 했어요. 베트콩 마을에 가서 환자도 치료해주고 마을마다 불교 사원이 있는데 종교라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잖아요. 베트콩들이 다 파괴한 사원을 우리 장병들이 전부 재건해주고 우리가 농기구도 많이 가져갔거든? 같이 가서 농사를 짓는 거예요. 탈곡도 해주고. 그러니까 따이한 한국군이 옆에 있으면 든든하고 걱정이 없는 거지요. 물 걱정 없지 식량 걱정 없지 치료해주지 농사 도와주지. 베트콩이 마음대로 마을에 들어오지를 못해요. 베트콩이 들어오면 주민들이 신고를 해준다구요. 그렇게 되니까 그게 결국은 우리 기업들 한진이 그때 제일 많이 들어왔었지만 우리 기업들과 노무자(당시는 근로자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들이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주민들 도움을 굉장히 받게 되는 겁니다. 현지 사정은 주민들이 제일 잘 아는데 그쪽 부락으로는 가지 마라 그쪽 길에는 베트콩 있다고 가르쳐 준다구요. 그게 얼마나 큰 도움입니까."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수송사업을 하려면 미군의 협조를 얻는 게 필수적이었다.이런 사실을 조중건 상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설사 한국군 측에서 이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더라도 사업가 입장에선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군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려고 월남까지 날아온 사람에게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조 상무는 맨 먼저 막역한 친구인 하인카스 부사령관부터 찾는다. "사이공 항의 사령관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마침 나하고 문산에서 같이 근무했던 카노 오리바라고 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 당장 찾아갔지. 진짜 반갑게 만났어요. 한참 웃고 얘기하다가 헬리콥터를 빌려 달라고 했어요. 왜냐 민간인은 퀴논에 갈 수가 없어요. 군복도 스몰 사이즈로 한 벌 달라고 말이지. 그랬더니 나보고 돌았다고 그러네? 군인도 아닌 민간인한테 누가 헬리콥터를 빌려줘요. 더구나 사이공에서 퀴논까지가 서울에서 제주도보다 조금 멀어서 기름을 두 번이나 넣어야 돼요. 완전히 더위 먹었다 이거야 하하하. 그렇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당신 전속 부관이 나를 데리고 가는 식으로 하면 될 거 아니냐고 냅다 소리를 질렀더니 웃으면서 빌려줘요. 퀴논으로 가니까 30여 척이 정박되어 있어요. 배가 석 달도 좋다 넉 달도 좋다 그러고 있는 겁니다. 배 주인은 상관 안 해요. 하역이 되든 말든 매일 5000달러씩 받으니까. 그러니 선주는 걱정 없고 미국 정부만 골탕을 먹는 거지요. 근데 보니까 하역하는 미국인들이 있긴 있는데 용역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지 엉망이야. 미국인들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해. 다 물러 터져가지고 말이지. 그때만 해도 누가 베트콩인지 몰라서 월남사람들을 하나도 못쓸 때예요. 그러니 그걸 내가 놓칠 수 있어요? 우리로서는 결정적인 찬스 아닙니까."〈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24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1] '조중건, 미국인맥만 접촉한다더라'

기업 규모나 인지도에서 내세울 정도가 되지 못했던 한진이 그나마 월남에서 행세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국내에서부터 미 군수용품 수송을 전문으로 해왔다는 실적이 뒷받침됐다. 그러나 그보다는 박정희 권부의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과 두루 친목을 다져온 조중훈 회장(당시 사장)이 월남 진출에 필요한 정부 지원을 받아낼 만큼 영향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고 거기에 미군 고위직 장성들과 인맥이 두터웠던 조중건 상무의 인적 네트워크 때문이었을 것이다. 월남은 미군만 전쟁하는 곳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군의 지원과 통제시스템 아래서만 어떤 사업이든 가능하게 돼 있다. 더구나 한국 기업이라면 설령 미군의 전쟁 물자를 수송하고 미군의 작전지역에서 사업을 진행시킨다 해도 월남 전역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한국군의 지휘권 영역을 가볍게 여겨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비록 일부 지역이라 하더라도 한국군이 주둔하고 한국군이 작전하는 지역은 미군이 아닌 주월 한국군사령부 사령관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조중건 상무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 인맥을 접촉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우리 대사관과 한국군 사령부에 알려지면서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언급했지만 한국군의 작전권은 주월 한국군사령부로 이관됐고 특히 수송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전략 전술의 원칙도 모두 채명신 사령관의 결정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작전 지휘권을 가졌다 해서 미군과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만 독자적으로 전술과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박 대통령의 지시로 김성은 국방장관이 미 국방부와 접촉하기도 했지만 채 사령관 역시 여간 힘든 설득과 논쟁을 했던 게 아니다. 결국 한국군의 작전에 한해서는 미군으로부터 전술과 전략을 포함하는 모든 지휘권을 쟁취했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던 절대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높은 전과를 올리고 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우애로 뭉친 한국군만의 작전이 필요했고 거기에 덧붙여 한진을 비롯해 월남에 진출한 국내 여러 기업과 파월 기술자들을 한국군이 보호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 사령관은 미국의 입장을 지원한다는 명분 못지않게 월남전을 통해 한국이 경제발전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면 기업들과 파월 기술자들까지 신변 보호와 사업권 보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지휘권을 필사적으로 확보해야 했다는 얘기였다. 그 때문에 미군도 자국 기업체들이 챙겨야 할 실리를 전혀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그들의 저항이 매우 심했다는 비화도 소개했다. 그러면 미군과 한국군의 전략과 전술은 어떤 차이가 있고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채명신 전 사령관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는 작전 지휘권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바로 부닥치는 사안이 전략 전술 문제였다고 했다. "우리가 월남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작전 방침이나 전략이나 전술의 원칙 이게 군의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인 동시에 우리 기업들의 안전과 절대적으로 직결 됩니다. 베트콩이 출몰하고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안전 없이 어떻게 사업을 해요. 그 문제에 들어가자 미군 측이 굉장히 완강하게 나왔어요. 그 당시 미군의 전략 방침은 무조건 '탐색과 섬멸'(search and destroy)입니다. 탐색해서 섬멸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군은 '차단해서 섬멸'(cut and destory)이에요. 완전히 차단해가지고 섬멸한다는 거지요. 이것이 우리와 미군의 대단한 차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독자적인 모든 작전권을 가져오는 데 애를 먹은 겁니다." -탐색과 섬멸은 이해가 되는데 차단해서 섬멸한다는 게 어떤 뜻입니까? "월남전은 베트콩의 게릴라전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아요? 월맹이 베트콩을 지원해주면서 시작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공산 월맹군의 전략이 뭔가 하면 '마오쩌둥 전략'입니다. 나는 소위 때부터 제주도 사태를 다루면서 마오쩌둥 전술을 연구했고 책도 많이 봤는데 마오쩌둥의 기본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한 게 '게릴라는 물고기다. 인민은 물이다.'이거예요. 이건 마오쩌둥 전략에서 가르치는 게릴라 전술의 핵심을 찌르는 대원칙이라구요. 그게 무슨 얘긴가 하면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는 없잖아요. '너희는 인민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민 속에서 작전하라' 이거거든요. 다시 말하면 베트콩들은 인민을 인질로 해서 전투를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그렇다면 우리가 마오쩌둥 전략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을 써야 할 거 아닙니까. 그게 물과 물고기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물과 물고기를 분리시키면 물고기는 죽잖아요. 그러니까 차단해서 섬멸한다는 거지요. 다시 말해 물과 물고기를 분리시키는 데 성공하면 우리는 작전에 성공하는 것이고 그걸 못하면 우리는 전투에서 지게 되고 엄청난 장병들의 피해가 있는 건데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17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0] '한진이 미군 수송장교들 살려준 셈'

-의외의 내용이군요. 한진이 미군 수송감을 살렸다니 금시초문입니다. “이런 얘기 아마 첨 들을 겁니다. 6·25 이후부터 60년대, 70년대까지도 그랬지만 미군의 모든 물자, 기름과 군수품이 전부 인천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 미군 수송부에서 부평으로 수송하고 부평 보급창에서 문산, 동두천, 의정부, 그리고 서울에 보급을 했다구요. 그런데 그때 한국 사회가 엉망 아닙니까. 미군 트럭들이 부두에서 부평까지 보급품을 나르는데 중간에 반은 다 없어져. 한참 가다 보면 언제 귀신이 타고 있었는지 트럭 뒤에 타가지고 다 던지는 거요. 하하하. 미군부대에 도착해서 보면 반 남으면 잘 남은 거고 3분의 1이나 되나? 그러니까 미군들이 펄펄 뛰는 거지요. 보급창에 쌓아둔 기름도 어느 날 보면 ‘도라무통’(드럼통)이 저절로 구르네? 사람은 안 보이는데. 그걸 훔치느라고 땅굴을 뚫고 지하수 관로를 타고, 그야말로 별짓을 다 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그런 시절입니다. 아마 그때 땅굴 팠던 놈들이 전부 북한으로 갔을 거야. 그러니까 초소가 있는데도 휴전선에서 땅굴을 귀신같이 팠지? 하하하.” -분실되는 것을 한진이 막았다는 겁니까? “막은 정도가 아니라 살려줬다니까요? 무슨 얘기냐, 전부 도둑을 맞고 그럴 때, 우리 조중훈 회장이 미군 보급창 대장을 만나 아이디어를 냈던 겁니다. 그게 한진이 수송사업을 하게 된 계기고, 미군 수송감들을 살린 거예요.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대장, 걱정하지 마. 내가 실어줄 게. 내가 수송 전문업자야. 물건 잃어버려? 그건 내가 변상해주겠어. 당신은 수송비만 내.’ 몇 t을 몇 마일 나르는 데 얼마다 하는 기준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걸 내라는 거지. 그렇게 해도 도둑맞는 물자보다 수송비가 더 싸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한진에서 돈으로 해주든가 물건으로 변상을 해준다는데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보급창 대장이 생각할 땐 기가 막힌 제안이지. 그렇지만 반신반의해요.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물건으로 변상해?’ ‘양키시장에 가면 있잖우. 도둑맞은 건데 그게 양키시장으로 다시 나오지 어디로 가겠수?’ 하하하. 보급창 대장이 그런 조건이라면 좋다 이거죠. 도둑을 자꾸 당해서 죽을 지경이고 만날 얻어터지고 시말서 쓰고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거야. 그게 결국 수송감들을 살린 것이고, 한진이 미군 물자를 맡은 계기고, 월남에서 그때 인물들을 다 만났으니 미국 용역회사들이 있는데도 전부 물리치고 우리가 수송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업의 성장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부의 지원책을 제외해 놓고 본다면 한진은 기술력이나 자금력으로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해 거대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인맥이 밑거름이었고, 거기에 창업주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회 포착이 기술력과 자금력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기업은 곧 사람이고 인맥은 곧 인연인데, 창업주부터 인맥을 중시했기 때문이겠지만 월남 진출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예외일 수 없다는 얘기로 들리는 부분이다. 조중건 고문은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한진그룹에서 드러내지 않고 있는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도, 어느 기업도 따를 수 없는 세계적인 인맥이라면서, 한진이 대한항공도 인수하고 오늘날의 한진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겉으로는 분명히 월남 전쟁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시작하는 셈이지만 내막적으로는 사람하고의 인연이 한진을 성장시킨 힘이었다는 것이다.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려니까 얘긴데, 내가 버클리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편지도 써주고 장학금 알선도 해주고 그랬던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월남에 진출할 때도 펜타곤에서 결정적인 정보와 도움을 준 사람인데 ‘레이칸(Laikan)’이라는 중령이 있습니다. 그 사람하고 오랜 인연이 따지고 보면 사실상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키운 겁니다. 내가 53년 당시 철원 5사단 포병부대에서 송찬호 장군하고 복무할 때 그 부대 고문관이면서 미 펜타곤의 연락장교로 와 있던 사람이 바로 레이칸 중령이에요. 닉슨 부통령도 직접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 레이칸과 친해요. 그 사람하고 내가 전방에서 막사를 같이 썼어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레이칸도 내가 필요했지요. 좁은 천막 속에서 세 끼 식사 같이 하고 친형제처럼 생활했는데, 많은 사연이 있지만 그때의 인연이 결국에는 월남까지 숱한 도움을 주고 그랬거든? 그러니 한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겁니까.” 아마도 월남에서 레이칸과도 뭔가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조 상무는 월남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보니까 정말 아는 사람투성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첫날부터 현장을 누볐다고 했다. 상황파악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미군이 한진을 위해 문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당시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미국에서도 천재라고 했을 정도인데 월남에 부두 시설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간과했다라는 것이다. “병력은 비행기로 투입될 수도 있고 걸어서라도 이동하면 되지만 보급 물자는 선박이든 비행기든 수송을 하면 즉각 하역이 돼야 전쟁을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역 시설이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엉망이더라구요. 그걸 고려하지 않고 막 쏟아 부었으니 말이야. 그러니 그게 전부 돈인데, 이 양반(맥나마라)이 한진을 위해서 모른 척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구, 하하하. 그래가지고 나로서는 좌우간 사람이 자본이고 막 밀어댈 작정이었으니까 부사령관부터 찾아 나설 판이에요. 솔직히 정부가 월남 참전을 결정한 건 우방을 돕고 반공을 하기 위해서지만 사업하는 우리는 전쟁하는 나라에서 돈 좀 벌어 경제부흥을 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어떡하든 일감을 콱 물어서 주머니에 넣는 게 장땡이란 말이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없어요. 친구가 써준 소개장은 신주 모시듯이 넣어놓고 그때 주월 대사가 신상철씨인데, 그분도 공군 소장으로 예편하셨는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내셨고 대단한 분 아닙니까. 한 사람만 거치면 다 알잖아요. 인사를 드려놓고, 우선 한국대사관 바로 뒤에 있는 앰배서더 호텔에 숙소를 정했어요.” 그러나 조 상무의 친화력과 활약이 아무리 뛰어나고 인맥이 두터워도 미군만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10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9] 운도 척척···미군 친구가 병참 책임자 소개

월남을 제대로 치겠다는 얘기였다. 그것은 미군이 승리할 때까지 탄약을 비롯해 전쟁물자를 무한정 지원한다는 뜻이니 한진에는 넉넉한 일감이 있다는 암시였다. 사실이 그랬다. 파월 한국군이 68년 12월 28일 발표한 종합 전적만 해도 2년 동안 사살이 2만1000명이 넘는다고 했을 정도니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군이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을 테니 펜타곤의 전략물자 투입 계획은 사실적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정부 보증까지 받아가며 새로운 장비를 대거 구입해 월남 진출을 계획해 왔던 한진인데, 출발 직전에 믿고 있었던 미군 인맥이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됐으니 조 상무로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치열한 전장에 뛰어들어 일감을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한진의 사운이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미국에서부터 오랜 친구였고 여차하면 ‘빽줄’로 생각했던 ‘하인카스’라는 부사령관이 월남에서는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아닌 전투담당 부사령관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조 상무는 맥이 쭉 빠지더라고 했다. 말하자면 수송을 담당하는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하나 더 있다는 얘기였다. “정신이 번쩍 나더라구요. 내가 급하면 하인카스 장군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헛짚었다 이거죠. 더구나 마이클 장군 이 친구도 빈소리를 하는 친구가 아니에요. 정확히 판단해주는 거지요. 자기가 모시고 있던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워싱턴에서 월남까지 에스코트해서 사이공에 모셔놓고 일부러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친구라고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월남 간다고 하는 마당에 허튼소리나 할 리가 있겠어요? 솔직히 눈앞이 깜깜해져요. 친구니까 좋은 데 가서 한잔하자고 그러는데 그 소리도 싱겁게만 들려요. 구정에 문 다 닫았지 좋은 곳이 어딨느냐고, 너도 헛짚었다고 꽥 소리치며 웃었지만 나는 속이 타는 거지요.” -하필이면 출발을 하루 앞두고 그런 소식을 들었으니 참 난감하셨겠습니다. “난감한 정도가 아니라 깜깜했지. 한진으로서는 첫 해외 진출이고, 더구나 전쟁 중인 나라에 대규모 수송 인력과 수송 장비를 투입하겠다는 상황 아닙니까. 우리로서는 사운을 걸고 많은 준비를 해왔고. 그런데 갑자기 기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해봐요. 미칠 노릇 아니겠어요. 근데 참 희한해. 내가 사업은 운이 착착 맞아 들어가야 된다는 얘기를 했지만 때마침 그 친구가 서울에 오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하인카스 장군만 믿고 덜렁덜렁 갔을 거 아니오. 물론 급하면 하인카스 장군한테 병참담당을 소개받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사업은 그게 아니거든.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수송이니까 무조건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꽉 잡아야 되고 유대를 계속 해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러자면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소개를 받아야 돼요. 근데 마이클이 왔잖아요. 그 친구가 병참담당 부사령관의 심복처럼 가깝다고 했단 말이죠. 이게 운이에요. 자기가 대령 때 모셨던 장군이 ‘앵글라’라는 바로 그 병참담당 부사령관이라는데 그 친구가 내 옆에 앉아 있단 말이야. 그게 절묘하지 않아요?” -워싱턴에서 사이공까지 직접 동행해서 모셨다면 보통 사이가 아니었겠군요. “남녀 사이도 그렇게까지 하기가 어려운 거 아닙니까. 워싱턴에서 사이공이 어딘데. 그 얘기를 듣는데 머리를 탁 치는 거지, 하하하. 당장 소개장 하나 쓰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술집에 타이프가 있나? 펜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옛날 군인들이 보고서 올릴 때 쓰던 누런 종이가 있어요. 파란색 선이 죽죽 그어져 있고. 거기에 장군들이 겨드랑이 밑에 꽂고 다니는 노란 연필이 있는데 그걸로 좌우간 알아보지도 못하게 소개장을 꾹꾹 눌러 썼어요. 서로 막 웃고 말이지. 그걸 받아 넣고 다시 부탁을 했어요. 워싱턴에 돌아가면 앵글라 부사령관한테 나를 특별히 소개하는 텔렉스를 쳐 줄 수 있겠느냐고.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는 거지요. 그랬더니 기꺼이 ‘슈어’. 그게 나중에 진짜 월남에서 먹히는 겁니다. 하하하.” 조 상무는 평소에 인적자원의 대부분을 형인 조 회장이 닦아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월남에서는 군 경력이 많았던 조 상무의 인맥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실토했다. -결과적으로 출발 전에 이미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소개 받은 셈이니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마음이 좀 놓였던 건 사실이고, 인맥을 자꾸 얘기하면 거북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월남전에 뛰어들 때는 그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수송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장황하게 여러 가지 배경 설명을 하는 건 어떻게 돼서 미국 용역회사들도 있는데 다 물리치고 수송사업을 할 수 있었는지, 그걸 알아야 이해가 빠를 것 같아서입니다. 원래 운수업하고 산판업(山坂業)은 투기라고 했을 정도로 위험도 따랐지만 반은 운으로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상도 한진 편이 돼 줬다구요. 이게 무슨 얘기냐, 그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엉망이었어요? 그게 오히려 한진한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거지요. 얘기한 대로 나는 59년 11월에 귀국했지만 그 사이에 조중훈 회장이 57년부터 미군 군수물자 수송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때 집으로 초대하고 선물 주고 그런 것도 미군들하고 친목을 다지고 유대를 깊게 가지는 계기가 됐겠지만 그보다 미군 수송감들을 우리가 다 살려준 셈이라구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03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8] '여보, 나 내일 월남으로 떠나'

그러나 막상 떠날 때는 조 상무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쟁 중인 나라에 기업의 장래가 걸린 신작로를 닦으러 출정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심적 부담이 여간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집사람한테도 딱 떠날 때쯤 알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불안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짱도 생겨요. 내가 한국군에서 소금국도 먹어봤고 일선에도 가 있었고 미국 군대도 가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접시도 하루 2시간씩 닦아봤고 신문배달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는 인생의 밑바닥을 다 걸었는데 전쟁이야 한국전쟁도 경험했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거지요. 1월 22일이 구정입니다. 잔뜩 차려 먹고 내일 떠나는데 이젠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여보 나 내일 월남 간다.' 깜짝 놀라는 거죠. 더구나 전쟁을 하는 곳인데." -그걸로 작별 인사는 끝입니까? "끝이긴 이혼 당하는 줄 알았지. 하하하.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달래지만 그게 됩니까? 전쟁터로 간다는데. 기가 막히고 구정이고 뭐고 없어요. 미쳤다는 거지. 붙잡고 말리고 난리예요. 근데 우리 집안은 위계질서가 대단합니다. 형님이 금광에서 돈 냄새가 난다고 어느 정도 나는지 조사를 해보라고 해서 가는 거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울다가도 아무 소리 못해 하하하." 실제로 한진그룹 창업주의 가족사는 재계에서도 어두운 소리 나오지 않고 화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조 상무는 모든 것이 '형수'에게서 나온다는 얘기를 했다. 객담일 수 있겠지만 경제인들과는 대체로 업무적인 얘기만 하다가 가족사를 듣게 되는 것은 퍽 흥미있는 일이기도 해서 일부를 소개한다. "우리 집안이 말이죠 우선 형수님부터 보면 서울토박이고 내가 알기에는 우리 형수님의 아버님이 경리 출신입니다. 옛날의 서울토박이라면 샌님이라고도 하지만 양반 기질이라는 게 꽉 자리 잡고 있잖아요. 거기다가 원칙적이고 깐깐한 그런 부친 밑에서 아주 철저하게 가정교육을 받은 형수님이라 시집와서도 집안에서 풍파를 일으키거나 어떤 문제로 시끄러운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했어요. 형제들끼리 싸운다? 아예 그런 일은 싹부터 잘라서 없게끔 만들고 내 기억에도 그런 문제는 일으키지도 않았고 전혀 없었어요. 서로 얘기할 게 있으면 다 하도록 하고 이해를 해서 풀도록 하고. 그래서 집안의 질서를 지키려고 정말 노력하고 애들 교육도 그런 쪽으로 아주 철저하게 시키고. 그게 안 됐으면 우리 형님이 기업을 일으키고 밖에서 그렇게 일을 하기가 어려웠겠죠. 집안이 시끄럽거나 우환이 있거나 하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신경이 쓰이는데 무슨 일을 해요. 특히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가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절대 될 수가 없지요. 더구나 형님은 만날 바깥으로 나가고 바깥에서 일을 만드는 분인데. 그런 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형수님을 보면 참 많이도 참고 희생하고 있다는 걸 여러 번 느끼게 되지요." 사실 조중훈 회장의 근엄하면서도 정적인 언행과 조중건 고문의 동적이고 사교적인 모습에서 재계 사람들은 형제만 봐도 부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에피소드지만 두 형제를 비교하는 일화도 있었다. 형이나 동생이나 고객이든 회사의 중역이든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동의를 할 때 '예스(yes)'를 쓰지 않고 '슈어(Sure)'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래서 한때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의 '슈어'가 유행어처럼 한진그룹에 번지기도 했다. 외형적으로도 두 형제는 다른 면이 많지만 조 고문은 가령 비행기를 탔을 때 승무원들에게 뜨거운 것은 아주 뜨겁게 차가운 것은 아주 차갑게 하도록 주문하기로 유명했다. 식사는 물론 승객에게 손을 닦으라고 주는 물수건도 받는 순간 집어 던질 정도로 뜨겁게 해야 좋다는 것이고 커피도 혀가 델 정도로 해야 '잘했어' 그랬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양호 회장은 예민하면서도 무척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조양호 회장은 위트 있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승무원이 되라고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수더분한 여승무원하고 있었던 일화다. 어떤 나라의 전통음식이 나왔을 때 조 회장은 '이걸 만드는 나라에서는 침을 발라가면서 만든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여승무원은 거침없이 '그러면 제가 침을 발라서 만들어 드릴까요?'했다는 것이다. 조양호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막 웃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해왔다. -이제 월남 시장을 개척해야 될 상황이 왔잖습니까. 다소 심적인 중압감이 있었고 더구나 한진이 첫 해외 진출인데 어떤 준비를 하신 겁니까. "솔직히 준비는 타이프라이터 한 대밖에 없었고 어떻게 되든 일단 월남 땅을 밟고 보자 문제가 있으면 거기 가서 해결하자 그런 각오였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도 사업이라는 게 운이 참 중요하다 운이 따라야 하겠습디다. 아이디어도 있어야지만 사업은 운이 착착 맞아 들어가야 돼요. 무슨 얘기냐 하면 그날이 구정이고 마음은 무겁고 한데 오후에 전화가 와요. 노스웨스트 항공사 지점장인데 마이클 장군이 서울에 와서 나를 찾는다는 겁니다. 마이클은 그 시점에서 2년 전에 대령 달고 8군 수송감을 하다가 미국에 가면서 장군이 됐어요. 그 당시 직책이 뭐냐 미 육군의 전체 수송감이야. 대단하죠. 그 사람이 나를 찾는다는데 귀가 번쩍할 거 아닙니까? 당장 전화를 했지요. 나하고 굉장히 가까웠어요. 너 언제 왔느냐 지금 거기로 갈 테니 기다려. 그런데 구정이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술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내일 월남에 간다고 하니까 왜 가느냐고 돈 냄새 맡으러 간다 누굴 만날 거냐 제너럴 하인카스 부사령관이 내 친구 아니냐고 그 친구한테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대뜸 헛다리짚지 말라고 그러네? 일순간에 멍해지는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26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7] '한국 장병들이 김치 먹게 해달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미 9개월 전부터 통조림으로 된 야전식량(C-ration)을 연구했고 생산까지 완료해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만일 야전식량을 공급하게만 된다면 사기와 전투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누가 봐도 친서는 파월 한국군을 위해 대통령이 부식까지도 신경을 쓸 만큼 장병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애정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김치까지도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미국도 기꺼이 환대했다. 정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라마 국방장관 험프리 부통령과 함께 김치 C-레이션 공급 문제를 거론하자 즉석에서 '우리도 좀 먹어보자'고 했을 만큼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전하는 보도였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파병으로 우리의 반공이념과 우방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경제개발 자금을 벌어들이는 시장으로서 월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외화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날개를 퍼덕이는 분위기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이나 월남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른 셈인데 그럴 때 한진이 달러 금광을 캐겠다고 나섰으니까 비록 미국 펜타곤 친구들을 등에 업고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정부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로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을 생각했겠지만 조 회장은 그것과 함께 월남이 한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1월 1일이 우리 한진그룹 창립기념일인데 매년 그날이 되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감이 교차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러 역경이 있었지만 월남에 진출할 때나 빚더미에 앉아 있던 대한항공을 인수할 때 생각을 해보면 참 심각한 결단을 했구나 싶지요. 특히 월남은 전쟁터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눈에 금광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광이 무슨 소용 있어요. 캐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터인데. 그러나 기업의 기회는 변화에서 오는 거니까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각오하고 진출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개인이든 기업이든 1달러라도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니까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나가서 외화 가득을 하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정부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 없이 그게 돼요?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데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그만치 노력했고 그 위험한 포화 속에서도 신용을 지켜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의 한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월남이라는 무대에서 누가 더 주연급으로 활약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진 같은 그룹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한진 성장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중건 고문(전 부회장)도 한국의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월남 시장은 분명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동감할는지 모르지만 한국 경제가 돌기 시작한 것은 월남 파병으로 받은 군인들 봉급 또 한진 같은 유수한 기업들이 많은 외화 가득을 한 것이 원동력이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월남 파병을 안 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는 힘들었겠다 그걸 하면서 미국에도 큰소리쳤고 경제원조도 더 받았고 안보문제를 제기해 군사원조까지 더 받으면서 일어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데다가 월남으로 갔던 기업들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이것저것 외화 가득을 많이 해서 형편이 좋아지고 그게 다 밑거름이 된 거 아니냐 그 돈을 다 송금하고 산업에 투자해서 이만큼 발전을 가져온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분명히 월남은 지금 생각해도 은혜의 땅이었다구요." 아무튼 누구도 엄두를 못 내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길바닥이 우리 자산이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국내 운송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한진이 이제 월남 시장을 한진의 시장으로 평정하겠다고 나설 때 선봉대장을 자임한 인물은 조중건 상무였다. 물론 조중훈 회장이 쌓았던 경험과 닦아놓은 대로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조 상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유한 친화력과 미군 통역장교 시절 맺은 끈끈한 인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군의 물동량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완을 보였다.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어요. 이미 비행기도 편도 티켓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단 말이죠. 근데 솔직히 막막해요. 관광이나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심정이다 보니까 집사람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가방도 내가 챙겼어. 더우니까 반소매 작업복 한 벌 쑤셔 넣고 타이프라이터 하나 챙기고 돈 3000달러 준비하고. 비행기 표는 왜 편도만 가지고 가느냐 돌아올 땐 월남에서 번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1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6] '작전권 없이는 월남 안 가겠다'

작고했지만 김성은 전 국방장관은 전투부대 증파의 배경을 경제 측면에서 회고하기도 했다. 60년대에 국민 애창곡처럼 소리쳐 불렀던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가사가 국민 모두의 공감을 얻었지만 박 대통령은 늘 '잘살게 해 보세 잘살게 해 보세'라면서 정부 각료들을 다그쳤다고 했다. "월남전이 터진 그때가 6.25를 치르고 나서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100%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잖습니까. 그 무렵에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85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빈곤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밀가루니 식용유 같은 것까지 미군이 갖다 줘서 우리 군대가 유지됐고 우리 국민도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라고 해서 밀가루 옥수수 이런 것들을 갖다가 먹고 살았던 겁니다. 국방비도 그걸로 사용했다구요. 그런데 안보까지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이북이 중공하고 상호방위조약이 되어 있고 소련하고도 상호방위조약이 돼 있고. 그래서 미군 2개 사단이 그때 한국을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2사단하고 7사단이오. 5만 명 가까이 주둔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뭐 미국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루 생존도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럴 때인데 미국이 월남전에 본격적인 개입을 결심하고 나서 우리한테 특별히 병력을 증파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김성은 전 국방장관) 이런 상황에서 채 사령관은 기업들과 민간 파월 기술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군만의 작전권을 확보했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도 자칫하면 확보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사령관으로서 부임하기 직전이지요. 청와대에 들어가니까 박 대통령께서 '가거든 미군사령관 지휘하에 들어가서 임무수행을 하는 게 좋겠다'. 맨 먼저 이 말씀부터 하시더라구요. 깜짝 놀랐죠. 그래서 내가 명령 불복종이 된다면 군복을 벗겠다 작전권이 없다면 가지 않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 드렸다구요." -이유를 설명했을 것 아닙니까. "6.25 때는 우리가 미군 지휘 아래서 작전을 했지만 월남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침략을 받고 있는 자유 월남을 도와주러 간다는 건 정치적인 명분이 있는데 그렇다면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해야 우리도 정치적인 명분이 서지 이 전쟁이 미국의 청부전쟁도 아닌데 미군 지휘 아래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확실히 못을 박아 버렸다구요. 절대로 미군 지휘 아래서는 작전할 수 없다고 말이죠. 우리가 작전권을 가져야 우리 장병들 사기도 올려 줄 수 있고 우리 기업들의 신변보호도 가능한 거라구요. 작전권이 없는데 어떻게 장병이든 기업이든 민간기술자든 보호를 합니까?" -박 대통령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디까.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지으시더라구요. '큰일 났다. 내가 브라운 대사하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러시더군요. 물론 대통령의 뜻은 알지요. 우리가 실탄 하나 식량 하나 심지어 가고 오는 것까지 전부 미군 항공모함을 이용하고 헬리콥터다 탱크다 그런 것까지 전부 미군의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미군 지휘 아래 있어야 잘해 줄 거라고 생각하신 건 백번 옳은 말씀이에요. 그렇지만 월남은 전쟁 양상이 특수하다구요. 굴 속에 베트콩들이 잠복하고 지역전을 치러야 할 때도 숱한데 전체적인 작전만 가지고 돼요? 전선이 없고 후방에 적이 더 많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전도 특수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말씀이 없으시더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시더라구요. '국가원수가 상대방 대사에게 말씀하신 건 취소할 수 없으니까 일보 후퇴해 주십시오. 월남의 전쟁양상은 특수하니까 세부사항은 양군의 군사령관이 만나서 결정하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랬지요. 그래서 앞에서 얘기했듯이 미군 사령관 스몰렌 대장하고 공군사령관 브라운 대장 깐깐한 라슨 장군을 만나서 굉장히 싸웠지만 우리 입장을 관철시켜 작전권을 확보했던 것 아닙니까. 그게 없었으면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 돈을 벌고 우리 기술자들 신변을 어떻게 보호합니까." 뒤에 한진이 수송과 하역 용역을 통째로 미국 회사에 빼앗기게 될 위기상황도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월남전을 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는 시장으로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한진의 입장에서는 늘어나는 병력 숫자만으로도 표정 관리를 해야만 될 일이었다. 실제로 형(조중훈)의 부탁을 받고 실패하면 귀국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왕복 티켓이 아닌 편도 티켓만 들고 월남으로 향한 당시 조중건 상무는 역시 형이 살피고 돌아와서 했던 얘기가 실감될 정도로 하역과 수송 물량이 황금 광맥처럼 줄지어 쌓여 있었다고 했다. 조 상무 얘기다. "부두에 가 보고 다 돌아보니까 엉망진창이고 형님(조중훈) 말이 틀림없는 겁니다. 처음 월남을 둘러보러 가셨는데 금광이 바다 위에 떠 있더라면서 네가 가서 보자기에 싸 오라고 했단 말이죠. 금광을 아예 통째로 보자기에 싸 오라 이거죠 하하하. 그러면서 한국에서 친했던 미군들이 월남에 다 가 있으니까 너만 가면 전부 반길 거다 그거예요. 가서 보니까 진짜 사이공 아니면 퀴논에 다 있어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12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5] '한국에 큰 경제적 이익 주겠다'

66년부터 한국군의 파병은 무섭게 증가했다. 어찌 보면 미군의 대리전처럼 비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군 증파에 대해서는 존슨 미 대통령이 감사할 정도로 급속히 이루어졌고 숫자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71년에 발간된 존슨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65년 여름 그 당시 15개 미 전투사단 7만5000명이 베트남에 주둔해 있었다. 맥나마라(미 국방장관)는 34개 사단 증원을 건의해 왔다. 만약 한국이 7개 사단 파병을 해 주지 않았다면 미국 병력 수준은 17만5000명 내지 20만 명으로 늘었을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회고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더라도 65년에 이미 미군 15개 전투사단이 주둔해 있는 가운데 곧이어 한국군 7개 사단이 파병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점까지 최소 10만 명 이상의 우리 장병이 전장에 투입(약 8년 6개월 동안 32만여 명 투입)됐다고 본다면 군사 측면을 떠나 한진 입장에서는 그만큼 장사할 수송 물량이 늘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군 7개 사단이 미군 34개 사단이 맡아야 될 정도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다는 부분도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군의 참전 지역이 그처럼 넓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월남의 전장 전체가 한진의 시장이었다고 유추해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 물론 한국이 본격적인 전투부대 증파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66년 1월 1일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서울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한국군 증파 문제는 비록 한진의 조중훈 회장 말처럼 '사업가는 사업성이 있느냐만 파악하면 되는 일이지 정부가 월남에 무슨 목적으로 파병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냉정한 발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부는 한국군을 통해 한진을 포함한 파월 민간업자들을 보호해야 했던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간략히 살펴 둬야 할 것 같다. 이미 언급했지만 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국내 문제와 함께 북한 공산당에 당했던 한국전쟁을 생각할 때 공산주의자를 지구상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싸우는 미국을 당연히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한의 남침으로 미군 1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한국 전선에서 발생했는데 미국이 증파를 요청하는 마당에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6.25 남침으로 유엔 16개국의 수많은 젊은 장병이 희생되고 1000만 이산가족이 생기게 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에 와서 아직도 사과 한마디 없는 북한에 한국이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을 돕는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모한 온정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울로 날아온 험프리 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국이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50만 명의 병력이 투입돼야 한다면서 한국이 1개 사단을 추가로 증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는 일본보다 당연히 한국에 더 큰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게끔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호사단의 잔류연대 혜산진(惠山鎭)부대와 백마부대 등 4만5000 병력이 추가 증파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한진을 포함한 우리 기업들과 민간 파월 기술자들이 월남 시장을 마음껏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신속한 파병이라든지 증파의 숫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존슨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한국군 7개 사단이 미군 34개 사단과 맞먹는 전투력을 지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독자적인 전술과 한국군만의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채명신 장군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성은 전 장관도 인터뷰를 통해 같은 증언을 했었다.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하지 못했으면 우리 기업들과 파월 민간업자들을 보호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였다. 증언의 일부 내용을 공개한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장군은 박 대통령을 만난다. 이미 육본 작전참모 부장으로서 비둘기부대 파병문제를 직접 다뤘던 그는 전투부대를 파병할 때도 박 대통령 앞에서 가장 먼저 논의한 것이 작전권 문제였다. 월남전이 발발했을 당시 채 사령관은 미군이 평화유지를 위해 비전투부대를 보내지 않고 만의 하나 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한다면 한국도 전투부대를 보내는 것은 불가피하겠다는 예상을 했었다고 했다. -왜 그렇게 예상하신 겁니까? "6.25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데 6.25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김일성이 5년 동안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군사력 증강에 광분해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를 지니자 기습으로 남침해 온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때 일요일이라 전부 외출하고 장교클럽에서는 전방에 있는 연대장 사단장까지 불러다가 술 마시고 댄스파티 하고 아가씨 끌어안고 춤추고 25일 새벽 2시까지 그 짓하고 있었거든요. 그러고 2~3시간 후에 적이 쳐들어왔잖아요. 그땐 곤드레만드레 돼 가지고 육군 사령부 고급장교들은 전부 술에 나가떨어졌고 일요일이라 장병들은 외출 보내거나 농번기라고 해서 시골로 다 휴가 보내고 실지 병력은 반도 안 남아 있었단 말이죠. 그때 북한 괴뢰는 탱크 전투기 120㎜대포를 막 갈겨대며 기습적으로 남침해 왔잖아요. 그러니 우리 전투부대는 거의 괴멸된 상태지요. 그러니까 부산까지 그냥 진격해서 내려가면 끝이에요. 그러면 그걸로 대한민국은 끝장나는 겁니다. 그때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것이며 그때 싸운 상대가 공산주의자들 아닙니까. 똑같은 상황이 월남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거기에 미군이 비전투부대를 넣겠어요? 당연히 우리로서는 미군을 도울 수밖에 없고 전투부대를 원할 거라고 예상한 거죠."〈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05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4] 편도티켓 들고 죽을 각오로 떠나

마침내 한진은 조중건 상무를 앞세워 월남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듯 조중훈 회장이 45년 11월 '한진상사'를 창업했지만 그 전에는 자동차 피스톤을 재생해 판매하던 '이연공업사'라는 소규모 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모든 산업시설을 군수지원 체제로 묶었고 조 회장도 피스톤 수리공장을 닫아야 했다. 그 후 해방과 함께 한진상사를 만들어 무역업과 수송사업으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급성장의 무대는 월남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현장을 지휘하는 미군 사령관들을 만나 교섭하는 것은 조중건 상무의 몫이었다. 그는 66년 1월 23일 왕복 티켓도 아닌 편도(출발) 티켓만 손에 쥐고 성공하지 못하면 월남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떠나는 것이다. 친화력이 뛰어난 조중건 대한항공 전 부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형(조중훈)이 다져놓은 바탕 위에서 나는 재주를 부렸을 뿐'이라며 형에 대한 애정부터 나타냈다. "그 양반(조중훈)이 머리가 참 비상합니다. 나하고 열두살 차이의 형님인데 같은 원숭이띠예요. 원래 엔지니어인데 휘문고보 3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져 해양대학의 전신인 진해해원양성소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2등기관사 면허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손재주가 아주 좋습니다. 집에서 라디오 재봉틀 같은 게 고장 나면 직접 다 고치고. 자동차 피스톤 공장을 한 것도 그런 재주가 있으니까 했던 겁니다. 물론 배도 탔지요. 외항선을 탔는데 1940년대에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를 쭉 다니면서 그때 세계가 이게 아니구나 정말 여러 가지 식견을 넓혔을 거예요. 그런 양반인데 한진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는 직접 들으셨을 테니 잘 알겠지만 나하고 펜타곤에 갔다가 식견이 넓으시니까 월남에 금광이 있다고 내다본 겁니다. 그게 사실상 시작입니다." -부회장님은 언제부터 월남에 뛰어드는 겁니까. "비서실장 겸 상무 때지요. 내가 53년 6월에 유학 장교로 미국 가서 미 포병학교 교관으로 2년 다시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까 미국에서 6년 동안 있다가 59년에 돌아왔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좋은 장군들 만나고 친구들 사귀면서 아주 좋았는데 와서 보니까 그때 한진의 1년 외형이 70만~80만 달러밖에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미국에 있을 때 형이 벤츠 타고 다닌다고 자랑해서 굉장히 버는 줄 알았거든. 하하하. 하여간 내가 귀국하면서 같이 일을 했는데 60년에 보니까 수송으로 약 170만~180만 달러가 되고 무역까지 228만 달러를 벌었어요. 그때 삼성이 제일모직.제일제당 한국유리가 판유리 공장 이런 걸 했고 우리는 수송을 중심으로 했지요. 운송부문에서는 최고였어요. 그러면서 61년에 서울~인천 간을 운행하는 고속형 한진버스 사업을 한 겁니다. 누구도 생각 못했을 때 아이디어였지요. 그러다가 월남파병으로 시끌벅적하니까 이 양반이 펜타곤에 가자고 하시더니 66년에 월남 가라고 하잖아요. 하하하." 조중건 상무를 미국인들은 '찰리 조'라고 불렀다. 어쩌면 한국인보다 미국인들이 그를 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미국 생활에서 보여준 그의 친화력 때문일 것이다. 본인도 부인하지 않았다. "나야 한국군에서 통역장교로 2년 미국 포병학교에서 교관으로 2년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 한국군도 알지 미국 군대도 알지 대학도 미국에서 다녔으니까 월남 가서 수송 물량 교섭하라는 형님 얘기는 당연한 거지요. 미국 사람 만나봐야 미국 대학 나왔을 거고 미군들 만나봐야 포병학교 출신 아니면 보병이거나 수송병과일 텐데 한 사람 건너면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형님이 수송 사업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월남에도 많이 있을 거고. 그러니까 안 될 일이 없겠다 싶은 거지요. 한국군도 웬만한 장군들은 거의 미국 포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구요. 내가 박 대통령도 광주 포병학교 때부터 잘 알았지만 나중에 미국 포병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마침 거길 유학 오셔가지고 6개월을 같이 있었어요.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미국에서 고생한다고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그러셨어요.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는데…." -국내서 통역장교도 하셨고 포병학교 교관까지 하셨으면 군 인맥이 상당했겠군요.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국군의 역사이기도 한데 5.16 때 박 대통령과 행동을 같이했던 많은 사람이 사실은 광주 포병학교 출신들이에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 그때가 52년이지요. 많은 고참 대령들이 광주 포병학교에서 단기 특별교육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군사고문단이 볼 때 전쟁은 해야 하는데 한국군 화력이 엉망인 겁니다. 화력이 전혀 없었잖아요. 한국군을 보강시켜야 되겠는데 전차부대도 없지 포병도 없지 굉장히 고민했다구요. 원래는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가 지원을 해 줘야 되거든요? 3개 대대가 실전을 하고 1개 대대는 예비대대로 있어야 되니까요. 근데 포병이 1개 대대밖에 없었단 말이죠. 그래서 미 군사고문단에서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를 만드는 겁니다. 급조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없다니요 무슨 얘기입니까? "그때까지 포병은 워낙 TO가 조금밖에 없었기 때2 겁니다. 그게 배경인데 그때 박경원(전 내무부 장관) 이기건 김동빈 송석하 그런 분들이 광주에서 특별교육을 받은 거예요. 박 대통령은 광주 포병학교에서 교관을 했고. 나중에 총무처 장관을 지낸 심흥선 그분은 교장을 했고 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 장군은 부교장으로 계셨죠. 그때 내가 광주포병학교에서 심흥선 교장의 보좌관 겸 통역관으로 있었으니까 자연히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인연으로 한국군도 웬만하면 다 아는데 5.16 일어나고 나중에 보니까 전부 아는 사람들이지 뭡니까 하하하." 한진은 운을 타고난 셈이었다. 찰리 조로 알려진 조 상무가 마침 귀국해서 한진에 있었다는 것도 이미 짜여 있는 운명의 설계도처럼 착착 손발이 맞아 들어갔지만 한진이 월남 진출을 결정했을 때는 미군의 투입도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다. 군 병력이 대량 투입된다는 것은 그만큼 하역과 수송해야 할 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한진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인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2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 박정희, 김용태에 '전황 파악' 밀명

한진이 정부의 각종 지원과 국가보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의 물자 수송과 하역을 포함한 운송사업을 해 온 실적이 당시로서는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조중훈 회장의 회고대로 장기영 부총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 사실 조 회장은 트럭이나 굴리고 물자나 수송하는 운송업자로만 기록될 인물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정부 문제를 해결하는 막후 인물로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훗날이지만 서울지하철 건설 때 정부는 애초 프랑스의 자문을 받아 모든 계획을 세우고 설계를 하면서 준비했다. 그랬음에도 객차차량을 놓고 뒤늦게 뛰어든 일본과 프랑스가 첨예한 수주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당시 집권당의 재정위원장을 비롯한 정치권이 개입하고 집권 공화당에 정치자금이 유입됐다는 등의 석연치 않은 문제로 일본에 낙찰되자 프랑스는 한국이 반대하는 북한의 WHO(세계보건기구) 가입을 오히려 지원하고 한국과 외교 단절까지 언급하면서 분노했다. 그때도 김종필 총리의 특명을 받고 프랑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조 회장이 맡아서 해결했다. 그리고 장기영 부총리 시절인 60년대 무렵에도 조 회장은 정부를 위해 큰일을 해치운 것이다. 정권이 위태로울 정도로 극심한 식량파동을 겪고 있을 때인 64년 무렵.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3분(밀가루.설탕.시멘트) 폭리' 사건으로 대통령 선거 때 밀가루 부대가 뿌려졌을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 633만9000달러어치 소맥을 사들여 대선에서 밀가루 부대를 집집마다 뿌린 것은 신임 장기영 경제팀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정부의 위기였다. 민주당과 민정당 등 정치권이 궐기하고 요동을 치는 상황까지 갔고 미국까지 나서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추가원조 1500만 달러를 취소하겠다는 압력을 가해 왔다. 추가 원조가 끊긴다면 정부는 외교적인 고립까지 초래해 최대 위기를 맞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럴 때 장 부총리의 부탁을 받고 나선 인물이 조 회장이었다. 한일국교가 수립되기 전인데도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 2000만 달러의 경제협력차관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껄껄껄. 그런 일이 좀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게 64년 일이잖아요. 사실 2000만 달러가 없었으면 미국의 압력에 대응하기도 어려웠고 정부가 곤경에 빠졌을 거예요. 그때 다나카 의원이 대장성 장관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장관이 나를 도와준 거지요. 일본 각의에서 차관을 통과시키느라고 애를 썼으니까. 그때 나도 쇼를 좀 했지 껄껄껄. 장 부총리가 특별히 부탁을 하니까 민간외교관 노릇을 좀 했던 건데 월남 진출하고는 관련이 없는 거니까 그런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껄껄." 어쨌든 조 회장은 펜타곤 방문 이후 정부가 기대한 이상으로 달러를 벌어들일 기세였다. 실제로 민간 수송부대가 월남에 대거 투입됐을 때는 전쟁물자를 실어 나르는 장비도 중요했지만 민간인력 자체가 달러박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한진만 인력수출로 달러를 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현대건설의 경우는 준설공사 등으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세탁공장을 운영해 큰돈을 만졌다. 말이 공장이지 세탁소나 다름없는 기능이고 기술만 있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세탁기술자로 채용했다. 군인들만 보이는 뜨거운 전쟁터에서 군복 세탁은 큰 자본 들이지 않고 몸으로 버는 장사였다.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나트랑에 2개 퀴논에 3개 캄란에 2개소를 열어 68년부터 3년간 548만9000달러를 벌어들였다.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로 손해를 본 것에 비하면 오히려 세탁공장 운영이 중요한 수입원이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인력수출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자금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월남전이 2차 5개년계획이 끝나는 71년이나 72년까지만 계속된다면 5개년계획 내용을 수정하거나 앞당길 수도 있겠다는 박 대통령의 구상이 그래서 나왔던 것이다. 실제로 전황 파악을 위해 박 대통령은 김용태(전 장관) 국회 국방위원을 은밀히 월남으로 밀파하기도 했다. 작고했지만 김 의원이 생전에 필자에게 회고한 내용에는 박 대통령의 경제적 실리 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어른이 경제개발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처음 파병할 때는 의리를 생각해 미국을 도와야 한다고 하더니 달러가 막 들어오니까 마음이 달라졌어요. 한창 전쟁 중인데 월남으로 들어가 인력활용을 살펴보고 오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미국에 들러 미군이 언제까지 폭격할 건지 알아보래요. 오래 할수록 좋다 이거지 하하하. 그때 정부에 돈이 뭐 있어요? 월남에서 벌어들이는 달러가 사실상 개발자금입니다. 그런 형편이야. 워싱턴에 도착해 당신들이 언제까지 북폭(월맹)을 할 거냐 왜 그러느냐 그걸 알아야 우리가 파병을 더 확대할 건지 말 건지를 검토할 거 아니냐 이랬더니 미 국방부에서 다 알려줘 하하하. 그런 다음에 비둘기부대 영내에 내 숙소를 준비하도록 연락해 놓고 내일이면 월남으로 떠나는 날이야. 난데없이 데이비드 기자가 알아가지고 한국의 김용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월남 간다고 전 세계에 타전해 버렸어요. 아이고…. 청와대에 연락하니까 그래도 들어가라잖아. 우리 인력을 더 투입할 시장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보라 이거예요. 월남에 도착하니까 거리 벽에 내 얼굴 붙여놓고 베트콩들이 현상금을 걸어놨어. 보는 즉시 사살하면 현상금 준다고 말이지. 그런 난리를 치면서 월남 달러를 경제개발에 최대한 활용한 겁니다."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22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2] '계약 할테니 300만달러 위약금 걸어라'

물론 한진에 관한 자료는 예상 외로 미국 펜타곤 서류함에 가득 보관되어 있더라고 했다. 한국에서 미 군수물자들을 수송할 때 무엇을 했고 어떻게 얼마에 했다는 것까지 전부 파일로 보관해 뒀더라는 것이다. 미국이 신뢰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이 원하면 수송하는 일감을 주겠다 계약을 해주겠다. 다만 주는데 조건이 있다. 월남에 장비를 가져오너라. 그걸 약속하는 의미로 300만 달러를 걸고 계약을 하자. 이게 핵심입니다. 첫 방문에서 아주 쉽게 약속을 받고 곧바로 계약을 했지요. 300만 달러는 위약금으로 걸어놓는 돈이지만 조건의 핵심이 장비이기 때문에 좋은 장비를 그만큼 가져오라는 얘기고 그렇게 하면 물량을 주겠다는 얘기예요. 그 당시 300만 달러면 대단한 금액입니다. 그렇지만 수송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나갈 노동력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는 모두가 근면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300만 달러로 시장을 열 수 있다면 큰돈도 아니고 분명히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지요. 더구나 버리는 돈도 아니고 장비 구입인데. 일단 귀국해서 펜타곤에서 있었던 일을 정부에 보고했어요. 이런 일이 있으니까 우선 정부에서 월남 정부의 양해를 좀 구해주시오. 그게 우리 땅이 아니잖아요. 점령지도 아니고. 그러니 우리 근로자들과 장비가 들어간다고 월남 정부의 양해를 구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뭐 그렇게 해서 시작을 한 겁니다."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시니까 쉽게 된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국내에서 특혜 문제는 왜 나온 겁니까? "껄껄. 정부 보증 때문이지요. 그땐 특혜가 될 수도 없는데 정부가 한진 문제로 긴급회의도 하고 그러니까 업계에서 누가 특혜 얘기를 좀 했어요. 하여간 300만 달러가 적습니까? 우린 그런 돈이 없었어요. 그걸 정부가 보증해 달라는 거지요. 솔직히 정부가 보증을 해주지 않으면 한진이 주저앉게 되는 그런 계약을 했어요. 배짱도 컸지 껄껄껄. 그 얘기를 하자면 장기영씨 그분이 그때 부총리 아닙니까.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장기영 부총리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겁니다. 하여간 그분에게 보증 얘기를 했더니 너무 놀랐는지 처음엔 눈만 껌벅거리고 말이 없어요 껄껄껄. 그러더니 딱 한마디야. 각하밖에 못해요 이러잖아요." -어떤 내용으로 계약을 했는데 정부 보증이 필요했습니까? "일감을 주는데 장비를 가져오라는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일은 1966년 5월 15일 이후부터 하기로 하고 300만 달러를 걸고 쌍방계약을 하자 장비를 못 가져 와서 일을 못하면 한진이 300만 달러를 위약금으로 물고 만약에 미국 측에서 작전상 필요 없어서 계약을 취소하면 300만 달러를 한진이 받기로 그런 계약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따리 장사는 안 되고 제대로 된 장비를 가지고 들어와라 그거거든? 그러니 일감은 확실하게 확보를 해주는 반면 우리도 확실한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서 전쟁물자를 작전에 차질이 없도록 신속히 수송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쌍방계약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꼼짝 못하는 거지요 서로가. 그런데 돈이 있나. 장비를 구입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실은 그 계약서를 가지고 귀국길에 홍콩에 있는 미국 은행부터 찾아갔어요. 융자를 받으려고. 거기서 계약서를 쭉 보더니 좋은 계약이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300만 달러 융자를 해줄 용의가 있는데 단 한국 정부의 개런티를 받아와라 담보도 없이 돈을 그냥 줄 수는 없으니 정부 보증서를 가져오라 이거지요. 말은 맞지. 그렇지만 우리 정부가 그 당시에 상당히 어려웠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장기영씨도 해줄 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계약은 해왔지만 계약서에 사인한 것밖에 더 있어요? 그땐 솔직히 전쟁터에서 어떻게 될지 내일을 모르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습니까.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자유중국(대만)을 방문하셨던가? 그랬는데 만나 뵙고 여차여차해서 수송시장을 뚫었지만 정부 보증이 없으면 결국 계약도 파기되고 월남에 나가서 일도 못하게 된다고 부탁을 드렸어요. 1965년에 한일국교가 됐지요? 그때 정부의 가용외화가 얼마냐 하면 4700만 달러밖에 없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쓸 수 있는 달러가 그 정도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그 숫자를 내가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도 난감하시지.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가서 용감스럽게 해라.' 껄껄껄. 해주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용감스럽게 하래요. 박 대통령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분입니다. 결국은 해주겠다는 말씀인데 부총리도 있고 정부 보증은 절차가 있으니까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장기영 부총리로서는 대통령의 언질이 있었으니까 동력이 붙었겠군요. "장기영씨한테 얘길했더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좋아서 신이 났어요. 그런데 대통령을 만나느라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계약한 날짜는 촉박하고 아주 급하게 됐어요. 언제 어느 날까지 장비를 넣기로 했는데 날짜를 못 지키면 계약상 7만 달러가 달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다고 했더니 나중에 재무장관을 했지만 황종률씨가 그때 재무차관인가 그랬는데 일요일에 한국은행에서 이사회를 열었어요. 일요일에 이사회 열었다는 얘기 들어봤어요? 처음 듣죠? 전무후무한 얘기일 거야 껄껄껄. 그것 때문에 내가 황종률씨한테 굉장히 싫은 얘기 들었다고. 중앙은행을 어떻게 보고 일요일에 긴급 이사회를 열게끔 했느냐고 말이지. 하여간 그렇게 한 덕분에 한국은행에서 개런티를 해준 걸로 융자 받고 장비 실어내 가면서 월남으로 나가게 된 거지요. 그때부터 5년 반 동안 우리 한진그룹이 정말 열심히 해서 엄청난 외화로 국가경제를 도운 겁니다. 껄껄껄."〈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14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1] 조중훈 회장 '펜타곤 직접 가 계약땄지'

60년대의 한국-. 그것을 극명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저울대는 없다. 그러나 단적으로 무게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다. 65년 10월부터 본격화되는 청룡과 맹호의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되면서 마땅한 세계 수출시장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그나마 믿는 시장은 월남이었고 66년 국가의 수출 총 목표액으로 잡은 것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이 목표액을 달성해보려고 정부는 강력한 '수출진흥정책'을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2억5000만 달러를 벌기 위해 정부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지금은 웬만한 중소기업 하나만 해도 2억5000만 달러 수출을 하지만 그런 정도가 60년대 한국의 경제 체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진의 월남 진출 계획은 성사만 된다면 더없는 기회였다. 이미 조중훈 회장(당시 사장)의 눈에는 황금을 캘 수 있는 광맥이 월남에 있다는 것이 보였다니까 일찌감치 혜안을 가진 셈이었다. 조 회장은 채명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맹호사단이 전부 천막에서 지내고 있더라면서 회고를 계속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다가 도착해서 다시 퀴논 항에 가보니까 부대로 수송이 안 된 짐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어요.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니 미군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게 전부 전쟁물자인데. 장병들에게 지급할 보급품도 전쟁물자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첫눈에 이건 금광이다 그래가지고 귀국 후에 정부에도 얘기하고 동생(조중건)을 보내고 그랬지요." -월남을 방문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파병을 한다고 난리를 칠 때지요. 내 입장에서는 가기만 하면 뭘 합니까. 실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사업 차원에서. 근데 전쟁하고 수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어야지. 파병은 하는데 전쟁이 어떻게 언제까지 갈 건지 그런 정보를 알아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월남을 가기 전에 먼저 미국을 갔어. 그때가 65년 8월이에요. 내가 57년부터 미군 수송을 했거든? 말하자면 한국에서 개척을 한 거지요. 미군 수송을 한국 업자가 맡은 것은 우리가 최초니까. 그러니 수송 장교들 고급장교들 다 알기 때문에 미국 펜타곤(미 국방부 본부건물)을 두드렸어요. 아니나 달라 전부 아는 얼굴들이야."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와 사귀셨습니까. "껄껄. 내가 어째서 고급장교들을 많이 알게 됐느냐 우리가 수송을 하면서 미군을 접촉할 때만 해도 미군 장교들이 한국 사람을 생각할 때 남자는 전부 도둑놈이고 여자는 '양갈보' '양부인'이고 집은 '하꼬방'이라는 시각으로 봤어요. 50년대 초기에는 다 그랬습니다. 미군과 얘기를 해보면 그때는 한국 사업가들이 지프를 타면 최고였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저것도 도둑질한 지프 타고 다닌다 이거예요. 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 사람들 선입관이 그랬어요. 불쾌하지. 그래서 나는 57년에 벤츠를 타고 다닌 거예요. 심리적으로 미군들 사고방식을 눌러가면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나를 다시 보는 거야. 그때부터 백만장자가 아니더라도 백만장자의 매너를 가져야 되겠다 하는 게 내 사고방식이 됐어요. 왜 미국이 알다시피 자본주의 국가인데 백만장자라면 우러러보거든. 집에 와서 봤을 때도 돌멩이로 근사하게 꾸며놓고 정원이 넓고 하면 할리우드 배우 집은 아니지만 꺼벅 죽거든 껄껄껄. 8군 장교니 뭐니 내가 대접도 받아봤지만 집으로 초대도 많이 했어요. 대접을 받으면 해야 되잖아요. 특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장교들 일이 끝나고 본부로 귀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초청했어요. 그러면서 임무 끝나고 가니까 네 와이프한테 주라고 선물도 꼭 했고. 그렇게 10여 년 가까이 한 5000명을 초대했지요. 그러니 친구가 많을 수밖에. 펜타곤에 가보니까 수송 장교들은 전부 반갑게 환호하고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묻고 전부 우리 편이야 껄껄껄."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특히 미군의 파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구조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미국 경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돼있던 것이 당시 한국의 경제 형편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는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행보를 하기는 어렵게 돼 있다. 무역적자와 흑자의 향방이 달러 가치와 원유가 미국의 성장률 그리고 미국 산업의 경쟁력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 있으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월남이 미국에 의존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구나 미국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의 수송업자로서는 월남에 진출할 수 있는 지렛대를 펜타곤에서 얻게 된다면 여간 큰 후원 세력을 등에 업는 게 아닌 셈이었다. 조 회장은 펜타곤에서 지원 약속을 받으면 무리하지 않고도 시동을 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덩치가 큰 만큼 추진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었고 정부 협조 없이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조 회장은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털어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한진이 정부 특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수출진흥에 정부가 총력을 쏟은 그때는 그런 큰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업체가 한진 외에는 없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외화벌이의 첨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장교들을 펜타곤에서 만났을 때 월남에서도 한진의 역할이 있다는 걸 인식시켰습니까? "당연히 얘기를 했지요. 정보를 얻겠다고 갔지만 한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 대부분이 수송 담당 고급장 교들이고 그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내가 얘기를 안 해도 왜 왔는지 알았을 거예요. 그만큼 친하게 지냈고. 미군이 그때 한 200만인데 고급 수송 장교라는 건 국한되어 있잖아요. 진급을 했어도 병과를 바꾸지 않으니까 여전히 수송 담당이고. 그러니 다 알지. 그래서 내가 한국군이 파병 가는데 우리가 수송을 하고 싶다. 우리한테 용역을 줄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슈어(Sure)' 하면서 아주 쉽게 답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직접 월남을 둘러보러 간 거예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07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0] 한진 조중훈 회장 '첫 눈에 금광 보여'

민간인 파월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회사가 한진이라면 유휴인력을 동원하듯이 모집해 보낸 곳은 '해외개발공사'였다. 한국 최초의 '인력수출' 공식 창구였던 해외개발공사는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 석정선 차장보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보면 김종필(JP)의 오른팔로 '하극상 사건'의 주역 중 하나지만 이미 62년 5월부터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과 인력수출 문제를 논의하는 밀담을 나눴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맨이었다. 국가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기능공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해 전국기능경연대회를 개최하도록 했던 것도 그였다. 석 차장보는 당시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차장 심흥선 소장과 박창암 혁명검찰부장 이훈섭 합참군수기획국 차장 등과 함께 군사시찰단 일원으로 월남에 도착해 고딘디엠 대통령과 직접 극비 회담을 한 후 해외개발공사를 만든 것이다. 생전에 LA에서 인터뷰를 했던 석 차장보는 정부가 얼마나 월남전을 경제발전에 활용하려 했는지를 가감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62년 5월 11일 고딘디엠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건 비화지만 사실 정부 안에 청와대 안에서도 반대파가 있었어요. 장병뿐만 아니고 민간인 파월까지 반대파가 있었다구요. 극비로 진행했는데 내가 떠나기도 전인 5월 3일 이후락 공보실장이 밀사 파견을 암시하는 얘기를 해버린 거예요. 말은 월남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했지만 그걸 표면적으로만 해석할 사람이 몇이나 됐겠어요. 그 얘기 속에는 이미 밀사 파견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리가 담겨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정치권에서 소란해지고 말이지. 박정희 의장이 화가 굉장히 났는데 그런데도 일단 갔다 오라고. 그래가지고 귀국하자마자 인력을 수출할 수 있는 공식 창구를 만들자 그게 해외개발공사가 된 겁니다." -시점으로 보면 상당히 앞선 구상이 된 건데요. 민간인 파월은 66년부터 되지 않습니까. "물론 시간이 걸렸지요. 1차 파병이 64년 9월인데 처음에 LST(상륙함)를 타고 사이공 동남쪽 123km 떨어진 몽타우에 101외과병원단과 태권도 교관단이 갔으니까. 그 후에도 미국과 외교문제 전투부대 파병 문제 복잡한 일이 많았잖아요. 하여간 해외개발공사를 처음에는 순전히 월남전만 보고 인력수출을 위해 만든 겁니다. 그때 목표가 10만 명만 보내자 그랬다구요. 우리 장병이 5만이다 6만이다 하는데 기술근로자를 10만 명 보내려고 했으니 말이지요 하하하. 그 당시에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노는 사람은 많아도 기술 근로자가 그만큼 있기나 해요? 그렇지만 일단 시도를 해 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일단 해 봐야 알 것 아니냐 해서 시도를 했어요. 근데 막상 하려고 보니까 월남은 전쟁 중이고 우리는 월남하고 용역창구가 없고 결국 미국 용역회사에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랬더니 당장 오케이야. 한 사람당 핸들링 비용 100달러씩 받기로 하고 근로자들은 무조건 500달러씩 해서 보내기로 계약을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걱정을 하면서 불도저 운전기사를 모집한다고 광고를 내니까 하루에 1만 명도 더 몰려와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불도저 운전수가 많을 줄 몰랐지. 근데 전부 가짜야 하하하. 운동장에 불도저 몇 대 빌려 놓고 시동만 걸 줄 알면 합격시킨다고 했더니 전부 시동을 다 걸어.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옆에 시동 거는 놈 하나만 있으면 순식간에 눈치로 다 배워요. 그걸 보면서 우리 국민은 달나라에 보내도 다 살아남을 거고 월남에 풀어만 놓으면 다 벌어 먹을 거다 해서 전부 보냈어요 하하하." 한진이 월남의 수송과 하역 시장을 개척한 것은 틀림없지만 독불장군은 아니었다. 정부가 인력지원을 했듯이 한국군 사령부의 지원도 결코 적지 않았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한진이 용역계약 만료로 미군 용역회사에 수송과 하역 일을 빼앗기게 됐을 때도 채명신 사령관이 스몰렌 사령관과 붙은 담판에서 이기지 못했으면 한진은 그것으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진출 초기부터 준비성도 없었고 허술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채명신 전 사령관도 웃으면서 엉망이었다고 했다. "내가 하노이 방송에서 하는 것을 직접 들었는데 처음에 영어로 하고 다음에 한국말로 그 다음에 월남말로 방송을 해요. 거기서 1달러에 팔려간 한국용병 괴뢰도당들이 용병으로 팔려왔다 이런 식으로 악선전을 하고 있는데 이게 전 세계에 다 퍼져 나갑니다. 그러면 나로서는 우리 장병들의 사기 문제 우리 근로자들의 사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하고 업체도 우리가 직접 보호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구요. 그래야 팔려오지 않았다는 증명이 되잖아요. 한진이 전부 다 자기들이 잘한 것처럼 그러지만 비교를 하자면 현대는 62년에 이미 캄란에 준설공사 하러 들어와서 이동 없이 한 곳에서 공사를 하지만 특히 한진은 일 자체가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걸 우리가 다 보호했다구요. 그런데 한진은 처음엔 물 마실 준비도 안 해 왔어요. 물이 얼마나 중요해요. 처음 해외에 나와서 그랬는지 말라리아도 있는데 모기장 하나 안 가지고 오고. 우리 장병들이 야전침대를 다 나눠 쓰고 모기장도 한 사람씩 덮게 되어 있는데 두 사람씩 덮고 한진에 나눠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쌀이 떨어지기도 해서 쌀까지 나눠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저걸(한진) 키운 겁니다." -한진은 우리 파월장병과 사령관님에게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군요. "구태여 그런 걸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했으면 좋겠어. 그때 한진의 조중훈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요? 내가 우동 한 오라기 얻어먹은 것도 없고 우리가 한진을 위해서 간 것도 아니고 경제발전을 위해서 우리 근로자들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도와준 거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장병들이 자기네들 신변 경호 다 해 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한진이 크게 성공했으면 파월장병들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될 텐데 나중에 고엽제 환자들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돼서 환자들을 위해 지원을 좀 해줬으면 했더니 고마운 거 인정하려고 하지 않더구먼." 어쨌든 한진은 월남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먼저 조중훈 사장부터 나섰다. 훗날 조 회장은 월남 진출에 대해 인터뷰하는 동안 줄곧 껄껄 웃으면서 첫눈에 금광이 보이더라고 말할 때는 다소 흥분하기도 했다. "월남에 무슨 목적으로 파병을 했는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어요. 난 사업가니까. 그때 한창 유행했던 노래가 '황포돛대'라고 있었는데 노래 가사처럼 황혼이 쫙 깔릴 무렵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까 퀴논 항이라고 있는데 하역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수송이 안 돼서 배가 한 40여 척 정박하고 있더라구. 아마 그때 맹호사단이 도착하고 나서 한국 민간인으로는 내가 처음일 거예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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